똥파리 (2009년 양익준 감독 작품)

 

한 남자가 있다. 거친 몸짓과 건들거리는 걸음.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부분은 욕이고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남자다. 앞뒤 가리지 않고 피아식별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상훈은 용역업체 행동대장이다. 영화 속 상훈은 그 어떤 관대한 관객이 보더라도 심하게 뒤틀린 인물이다.

평범하지 않은 고등학생이 있다. 아버지는 월남참전용사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약간 정신줄을 놓으시고 딸에게 수많은 폭력을 가한다. 하나 있는 남동생은 건달이 되어간다. 학업과 살림을 병행하며 아버지와 동생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받아야 하는 연희는 삶이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폭력을 행하는 남자와 폭력에 노출된 여학생. 그 둘의 만남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 똥파리는 폭력으로 파괴되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폭력에 전염되는 젊은이들의 비극적 악순환에 대하여 경고한다. 자신의 분노를 출소한 아버지를 폭행함으로서 진정시키는 상훈은, 그러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 손목을 잘라서라도 다 빼버리고 싶다는 핏줄에 대한 중요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 “똥파리”처럼 더러운 곳에서 웽웽거리며 살아온 상훈이 “나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정확히 포착한다.

 

연희와 상훈, 그리고 상훈의 조카 형인. 이 세 사람의 나들이 장면은 상훈이 그토록 꿈꾸어 왔으나 아버지의 폭력에 무참히 짓이겨진 가족의 모습이다. 점차 마음 속 분노를 줄이고 아버지와 누나와 조카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아 갈 때, 영화는 슬프게도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나 그 비극적 결말은 오히려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영화는 폭력을 행사하는 젊은이들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변환한다. 관객은 상훈의 폭력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욕설과 폭력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딱 한번 웃는 상훈의 밝은 웃음을 기억하며 상훈의 삶을 안타깝게 받아드린다.

 

폭력으로 파괴된 가족. 그 파편에 상처받던 이들이 모인 새로운 가족의 모습은 영화 속 상훈이 꿈이자 돌아갈 수 없는 유토피아의 저편이다. 그리고 그 유토피아가 이루어 졌을 무렵, 안타깝게도 상훈은 그 자리에 없다. 연희의 동생이 상훈의 용역회사에서 건달이 되는 마지막 장면은, 파괴된 가족의 피해자이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이 시대 수많은 젊은이들의 슬픈 현실이다.

 

똥파리
감독 양익준 (2008 / 한국)
출연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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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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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코드]에서 예수의 후손을 지키기 위해 이도 저도 아닌 단서로 머리를 굴리던 짜맞추기 달인 랭던교수가 돌아왔다.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도발적이고 직접적으로 구교를 공격한다. 물론, 종교자체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구교의 강력한 권력, 그 권력에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구교에 대한 적개심은 양념일 뿐, 까보면 개인의 욕심과 빗나간 신념으로 일어나는 비극적 살인사건을 밝히는 수사물일 뿐이다.

책을 읽었을 때 궁무처장 역은 호아킨피닉스가 어울릴듯 했는데 이완맥그리거도 나쁘진 않다.


문제는 교황의 비서인 궁무처장이다. 반물질이라는 빅뱅을 가능케하는 실험에 교황청이 참여한 사실을 알고 독실한 궁무처장은 신의 영역을 넘보려는 교황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려 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옛날 교황청에게 박해받은 "일루미나티"라는 과학자들의 모임을 부활시키고, 그 위기를 자신이 구하는 것 처럼 조작하여 스스로가 교황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교권을 확립하려 획책한다. 그러나 그 음모는 똑똑하고 잔머리 짜맞추기 대마왕 랭던교수에게 들통나게 된다.

반은 악마, 반은 천사.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이 가득 담긴,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신념을 위해서는 그 방식이 옳지 않더라도 끝까지 밀어부치는 결과론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 그는 살인을 통해 구교를 정화시키려 하였고, 마지막 몸을 불태우면서도 신에게 구원을 구걸한다. 대의를 위한 살인. 정화를 위한 순교. 그리고 정의와 불의의 혼재. 그 안에서 나약한 인간의 잘못된 선택은 도덕적이어야 할 종교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러나, 진실은 역시 감추어지고, 구교의 흔들린 도덕성은 심판조차 받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안쓰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객관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이다. 인터넷 누리꾼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거기에 자살이라 하니) 당황스러워 하다 타살음모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여권과 청와대의 실세들은 조문을 왔다 쫓겨나가고, 전국의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영화 이야기하다 갑자기 이 무슨 이야기인가?

일단, 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노무현 지지자가 아니다.(당연하지)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권 시절 수많은 집회와 시위에서 경찰들에게 맞은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릴 정도다. FTA를 추진하고, 수많은 노동열사들의 죽음을 종용했던 그를 내가 좋아할리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보를 전달했을 때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은 없었다. 단지, 그가 안쓰러웠다. 역대 대통령 중 깨끗한 도덕성을 지닌 대통령이 있는가.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이명박 대통령만 봐도 정답은 나온다. 그런데 왜 그는 죽음을 선택할 것일까.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큰 도둑이 못되서 죽었다" 라고 하던데 맞는 말 같다. 이 안쓰러운 죽음에 대처하는 이명박 정권을 보아라. 무엇이 두렵워 이러고 있는가.

영화 속 바티칸 지하에서 발견된 반물질 폭탄.

[천사와 악마] 영화 속 궁무처장은 스스로가 숨겨놓은 폭탄을 스스로 처리하면서 자신을 기적의 사나이로 만들려 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교황으로 추대될 것임을 계산하고 자신의 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여기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신의 뜻이다.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살인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는 그들은 신의 뜻을 벗어난 죄인이다. 죄책감은 없다. 독실한 종교적 신념은 광기로 번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는 이명박 정부의 꼬라지

이명박 정부는 사면초가다. 박정희때는 경제라도 살아났지 않았는가(그를 옹호하지 않는다). 근데 이명박은 아무것도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희망이 안보인다. 삽질 정부, 공안정부, 그리고 반민주주의 정부. 한 국가의 CEO가 되고자 했던 그의 신념은 이제 광기를 넘어서 헛짓거리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위의 사진이 바로 그의 (그리고 그의 정부)실체다. 무엇이 두려워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것이냐, 아니면 국민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것이냐.


                      오늘(25일) 오전 북이 핵실험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주말 모든 예능프로를 결방시키고 모든 포탈 사이트를 검게 바꾸었다. 그리고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언론들도 대서특필하며 그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뉴스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오늘(25일) 오전을 기점으로 헤드라인은 바뀌었다. 북의 2차 핵실험소식이 전해지자 사탕에 개미 꼬이듯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YTN뉴스를 4시간동아 보고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뉴스 마지막 한꼭지로 전락해 버렸다. 하긴, 청와대와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책임론과 국민적 질타를 한번에 묻어버릴 좋은 기회이긴 하다. 이명박에게 이것은 호재일 수 있다. 마치 용산참사를 뭍어버린 강호순 처럼 말이다. 보수언론의 공세를 그냥 믿을 국민은 많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궁무처장. 그는 나쁜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타살 음모설은 그런 고민을 낳았다. 신이 되려 했던 궁무처장은 방법보다 결과를 위해 신념을 광기로 뒤틀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은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조사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문 분향소를 봉쇄했다. 북의 핵실험으로 모든 보수언론이 기사의 꼭지를 비틀었다. 진실을 알기에는 우리가 접하는 매체는 너무나도 많다. 눈 뜨고, 귀열고, 마우스를 잡으면 초 단위로 쏟아지는 기사에 무엇이 진실이고 중요한지 판단이 흐려진다. 그러나 하나만 기억하자. [천사와 악마]에서 궁무처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교의 번영이었고, 그 목표를 위해서 도덕적 타락은 중요치 않았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 방법을 과연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진실이 두려워 감추려는 그들의 더러운 방법을 꿰뚫어 보는 것은 우리들의 깨끗한 도덕성이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더러움은 깨끗함을 가릴뿐, 없애지 못한다.


천사와 악마
감독 론 하워드 (2009 / 미국)
출연 톰 행크스, 이완 맥그리거, 아옐렛 지러, 스텔란 스카스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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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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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일까
조금은 생뚱맞을지도 모르는 시작이지만 우선 내가 어떤 과정으로 영화를 접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일단 내 소개를 하자면 연세대학교 원주배움터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며, 조금은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듣는 복학생이다. 특별히 영화를 좋아하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던 중고등학교 시절 주말에 시내 극장을 찾아다니는 것이 내 취미였고, 유일한 소비였다. 친구가 많지 않아 혼자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변 친구들보다는 많은 영화를 섭렵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가난한 자취생이기 때문에 학창시절처럼 극장을 자주 가지는 못한다.
 

                                    그래도 전 아이스크림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IT강국 아니던가. 극장을 가지 못하는 울분을 웹하드 서비스의 코인충전에 풀어내면서 그동안 보아오지 못했던, 그리고 아쉽게 놓쳤던, 또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던 많은 영화들을 폭식할 수 있었다. 장르와 감독과 주연을 가리지 않고 폭식하는 습관은 영화를 본 것인지 혹은 보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6년정도 지난 것 같다. 

영화를 쓴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난 영화가 전공도 아니요, 따로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을뿐더러, 영화비평이라는 범주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글발이 좋지 않다. 그저 영화를 본 후 내 생각과 느낌을 주절거리는 단순한 잡문에 불과하다. 컴퓨터는 싸이와 영화와 메신저밖에 모르던 내가, 이러한 나의 잡문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내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다.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두서없는 시작은 각설하고, 지난주 폭식했던 영화들 중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세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러브레터(이와이 순지감독, 1995년작), 무지개 여신(쿠마자와 나오토 감독, 2006년작), 그리고 이프온리(길 정거 감독, 2004년작).

 

죽음에 대한 영화
이 세편의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러브레터는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가 죽은 연인을 잊어가는 과정을 그렸고, 무지개 여신은 사랑인줄 몰랐던 사람의 죽음 후 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프온리는 연인이 죽을 것을 알게 된 남자의 희생을 다룬 영화다. 개인적으로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나에게 한줄기 눈물의 축복을 안겨준 영화들이기에 참 고맙다.

영화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男)  훈남이다.


죽음은 곧 상실, 그리고 그리움과 슬픔
영화에서 주되게 바라보았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소중함이다. 후지이 이츠키(女)는 동명 동급생이었던 후지이 이츠키(男)의 사랑을 그가 죽고 나서 깨닫게 된다.(러브레터) 오누이처럼 붙어다녔던 토모야와 아오이는 아오이의 죽음으로 그 사랑을 알게 된다.(무지개 여신) 사랑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이안은 사만다의 죽음을 예견한 후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녀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이프온리) 그리고 그 죽어간 이들의 진심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가슴이 동하고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고이지 않는가. 

왜 죽는지 궁금하지 않다. 얼만큼 화려하게 파괴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딱 미국이다.
(영화 트랜스포머)

가치없는 죽음, 그것은 관객의 선택적 판단
그러나 가치없는 죽음도 있다. 물론 영화속이다. 주로 헐리웃에서 만들어내는 블록버스터, 혹은 갱스터 영화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혹은 악당)의 총에 뿜어져 나오는 많은 탄환에 머리가 터지며 죽어가는 그들은 그저 죽는 역할의 배우일 뿐이다.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 우리는 그러한 장면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가령 트랜스포머에서 디셉티콘이 멋지게 변신을 하고 주변의 군인을 학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하는가. 왜 죽었는지 보다 어떻게 죽이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영화 무지개 여신의 아오이와 토모야. 이렇게 이쁜 우에노 주리를 몰라보다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
위의 세 편의 영화에서의 죽음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다들 알겠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후지이 이츠키(男)의 죽음은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다. 아오이의 죽음으로 토모야는 그녀의 사랑을 모른척 했던 죄책감과 미안함에 대성통곡을 한다. 사만다가 죽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까지 알고 있던 이안은 스스로 그 시간, 장소에서 그 방법 속으로 들어가 사만다 대신 죽음을 택한다. 죽음이 가치 있게 되는 순간, 그것은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故 김주익 열사. 돌아가신 후 내 삶은 달라졌다.

죽음의 가치?
이경해 열사가 스스로 몸에 칼을 긋고 돌아가셨다. 배달호 열사는 온몸이 불타는 고통속에서 돌아가셨다. 김주익 열사는 밥을 끌어 올리던 동아줄에 목을 감고 돌아가셨다. 더 멀리 가면 전태일 열사도 스스로의 목숨을 민중들에게 받치셨다. 가깝게는 허세욱 열사가 FTA반대를 외치며 산화하셨다. 수많은 열사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 민중들에게 무엇인가 깨닫게 해 주셨다. 그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그나마 이만큼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분들의 생각에 우리는 눈물짓지 않았는가. 가슴이 찢어질 만큼 고통스럽고 슬퍼서 그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살고 있지 않는가.

                            대학생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오늘 오전에 또 한명의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게 강요받던 여대생은 그 사실에 비관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버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생들이 목숨을 버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그들의 죽음은 그저 용기없는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라 치부하기는 너무나 슬프고 아프고 화가 난다.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들이었겠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따로 있다. 난 많은 대학생들의 죽음을 강요한 것은 현재 MB정부와 썩을대로 썩은 보수층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자 대학만을 원하는 이 나라 모든 대학 당국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넌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더 이상 죽지 말자, 아니 죽이지 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다.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은 하루에 6명씩 죽는다. 수많은 농민들은 비료 값이 오르고 쌀값이 떨어지고 값싼 외국 농산물이 들어올 때마다 죽어 나간다. 그리고 우리 대학생들은 매년 오르는 등록금에 죽는다. 경제위기를 연일 부르짖고 있지만 기업의 곶간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서민의 주머니는 비어가는데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그리고 우리들의 몫
이츠키(男)가 죽고 그 흔적을 따라 가는 이츠키(女)는 그가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고 한방울의 눈물을 흘린다. 아오이가 남긴 러브레터를 본 토모야는 대성통곡을 한다. 죽음인지 알면서도 택시에 올라타는 이안의 눈에도 한가득 고여 있는 눈물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여운에 관객들은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삶은 영화와 다르다. 소중한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같이 아파해야 한다. 영화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물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삶은 그 눈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친구들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두지 말자. 안타깝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영화 속 죽은 이들은 남은 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눈물로 남겠지만, 현실 속 우리들의 삶은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투쟁으로 올곧게 세울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세워야 한다.

 

러브 레터
감독 이와이 슌지 (1995 / 일본)
출연 나카야마 미호, 사카이 미키, 카시와바라 다카시, 토요카와 에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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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여신
감독 쿠마자와 나오토 (2006 / 일본)
출연 이치하라 하야토, 우에노 주리, 아오이 유우, 사사키 쿠라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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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 온리
감독 길 정거 (2004 / 영국, 미국)
출연 제니퍼 러브 휴이트, 폴 니콜스, 톰 윌킨슨, 다이아나 하드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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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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