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아리에티]

영화 2010. 9. 15. 18:43 |

# 영화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세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든 애니매이션은 언제나 그렇듯 소소하다. 3D로 제작되는 수많은 블록버스터 애니매이션의 화려함은 없지만, 그 특유의 부드러운 움직임에서 정겨움이,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하늘거리는 색감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정말 간만에 극장에서 관람한 [마루 밑 아리에티]는 영화를 보는 모든 순간, 그 따스하고 정겨운 화면으로 치유를 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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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취향 덕분에 블록버스터와 히어로 영화를 주로 보는 나로서는 극장이란 곳은 웅장하다 못해 귀가 멍멍해지는 사운드와 눈이 쫓아가지 못할만큼 빠른 속도의 화면을 뚫어져라 보는 곳이다. 당연히 영화 관람 후 몰려오는 피로감이 크다. 그러나 아리에티를 만나는 순간, 그리고 관람하는 90여분의 시간은 나에게 극장이란 곳이 휴식과 치유의 공간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제목 그대로 마루밑에 사는 소인들의 이야기다. 호기심 많은 14세 소녀 아리에티가 쇼우라는 인간 소년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소인들은 그들이 필요한 것은 인간들의 물건에서 조금씩 빌려쓰면서 살아가고,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면 살고 있던 곳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아리에티가 호기심에 인간 소년에게 들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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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이 애니매이션은 커다란 갈등도 없고, 갈등을 유발하는 악인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보여주고, 일상적이었던 울타리를 약간 넘어간 아리에티의 행동을 보여준다. 인간 소년인 쇼우는 소인보고도 놀라지도 않고, 그들을 잡을 생각도 안한다. 마치 당연히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인 것처럼.

아리에티의 가족은 그들과 같은 종족들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른다. 같이 살던 친구 가족들은 인간에게 잡혔거나 그들을 피해 어디론가 떠나갔다. 아리에티가 쇼우를 만난 이후, 그녀의 가족들 역시 다른 곳으로 이사를 준비한다. 빌려쓰는 그들이 지키는 철칙이다. 인간들과 행복하게 사는 해피엔딩은 없다. 헤어짐이 아쉬운 소년소녀의 아릿한 그리움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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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것은 바로 소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각설탕 하나 혹은 휴지 한조각을 빌려쓰면서 살아간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조심스럽고 조금조금씩 빌리는 거다. 아리에티가 살던 저택의 인간은 소인들을 위한 집까지 만들어 놨다. 언젠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소인들은 그 좋은 집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인간들의 저택에서 멀고 험한 이사를 결정한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빌려쓰는 존재인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어겼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아리에티와 그녀의 가족들이 사는 방식이 어쩐지 우리과 닮았다는 생각이다. 우리도 빌려쓰는 존재이지 않은가. 자원을 빌려쓰고 물을 빌려쓰고 공기와 땅과 하늘과, 우리들 보다 먼저 존재했던 모든 것들에게서 우리는 빌려쓰고 있는 존재다. 답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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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아루에티]에서 나온 소인들의 삶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지금처럼 파괴적인 자연에 대한 수탈의 행위를 멈춰야 된다는 조용하고 힘있는 주장이다. 자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빌려쓰며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고 희망찬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달콤하고 확고한 충고다. 심장 수술을 앞둔 쇼우처럼 몇일 뒤 우리가 살고 있는 대 저택의 가장 가까운 우리 편이 죽을 수도 있다는 무섭고 소름끼치는 경고다. 수채화 처럼 정겹고 따스한 장면에서, 커다란 갈등없는 잔잔한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메세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경고다. 다만, 겁을 주기 위한 경고가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이다. 아리에티의 가족들의 삶에서 그 희망을 보았다.


뭐, 개인적으로 삽질대마왕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MB라고 안했음)

아, 마지막으로, 전 대강 반대합니다.

마루 밑 아리에티
감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2010 / 일본)
출연 시다 미라이,카미키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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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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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색다르다.

영화 초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지만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우주선이 불시착했다는 설정만으로도 재밌다. [반지의 제왕]으로 명예와 부를 동시에 얻은 피터 잭슨이 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만발이었다. 어떠한 내용인지, 그리고 무슨 영화인지도 모른체 관람한 [디스트릭트 9]은  영화시작 30여분만에 개인적인 SF영화 순위 상위권에 링크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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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평화로운 도시 요하네스버그. 어느날 거대 우주선이 도시 하늘에 나타나 미동도 하지 않는다. 궁금해진 사람들은 우주선에 들어가는데 수많은 외계인들이 그 안에 고립된 체 표류하고 있었다. 아마 어떤 이유로 불시착을 한 듯 하다. 사람들은 외계인을 도시 외곽에 수용하고 공존을 결심한다. 그리고 20년이 흐르고, 더 이상 외계인들은 신기한 존재도, 공존의 대상도 아닌 우리와는 "다른"존재일 뿐이다. 수용된 구역은 슬럼화 되고 도시의 암덩어리로 전락한다. MNU산하 외계인 담당부서는 이들은 보다 먼 곳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외계물질에 노출된 주인공은 서서히 외계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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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는...

전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으나 몇가지 특별한 점을 짚어 본다면, 첫째로는 구성방식이 참신하다. 시작부터 인터뷰장면을 편집하여 20여년간의 외계인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끝까지 다큐를 보는 듯한 편집으로 사실성을 부각한다. 당연히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영화에 대한 몰입도는 그 구성으로 만들어낸 사실성만큼 높아진다. 비슷한 영화로 [클로버필드 (j.j 애브라함 감독 2006년작품)]를 떠올릴 수 있다. 두번째, 외계인이 등장은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아니다. 주인공의 변태과정과 외계인들을 박해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그 중심이다. 즉, 외계인과의 전쟁이나 갈등이 아닌, 외계인을 매개로한 인간들의 모순이 주된 이야기다. 비슷한 영화로 거대 쓰나미를 인물들의 갈등과 화해의 촉매제로 사용한 [해운대(운제균 감독 2009년작품)]가 있다. 세번째, B급정서가 가득 담겨있다. 물론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치고는 시각효과도 뛰어나고 물량공세도 어마어마하다. 상대적인 저예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영화 속 전투장면에서 폭발하는 사람이나 사지가 찢겨나가는 사람 등의 장면은 피터잭슨이 [데드얼라이브 (피터잭스 감독 1991년 작품)]에서 보여준 그의 취향을 듬뿍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제왕 (피터잭슨 감독 2001년 작품)]에서 보여준 막힘없는 내러티브 능력도 놓치지 않았으니 그저 흐믓하게 관람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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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중요한 것은 영화 전반적으로 깔린 인간들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다. 우리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의 능력에 대한 질투는 그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그들의 무기는 우리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능력도 우리보다 월등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고 우리는 다수다. 그들이 번식하는 것을 경계하고 우리와 섞이는 것을 차단한다. 놓은 철조망 속의 그들은 제거의 대상이며 골치덩어리이자 우리들이 우주에서 가장 월등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눈에 가시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주인공은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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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는...

시선을 조금만 넓게 본다면, 영화 속 외계인들은 그냥 외계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외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에 수용된 외계인. 그들이 갖힌 디스트릭트9. 영화에서 감독은, 혹은 제작자인 피터잭슨은 다수인 우리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어두운 시선을 멀리서 관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비약해 본다면, 우리 주변에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디스트릭트9"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고, 먹이를 던져주면서 자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 볼만하다.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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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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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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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픈일이다. 한루 한달 일년 십년 지나가는 세월에 기력은 쇠퇴하고 시간은 빨라진다. 지나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것 처럼 늙어간다는 것도 막거나 정체시키지 못한다. 주변의 변화에 적응이 더뎌지고, 많은 기억과 추억은 그 수명을 다하며 바로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하기 힘들어진다. 늙어간다는 것은 몸이 쇠약해지는 생물학적 슬픔보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더 슬픈일이다.

그것은 기쁜일이다. 생각은 깊어지고 경험은 풍부해지며 사리분별과 상황판단의 근거가 늘어간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가는 기쁨과 내가 창조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 진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벗이 있다면 늙는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기쁨이 배가될수 있다.

워낭소리. 그것은 대화였다.

늙은 농사꾼이 있다.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어 9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몇십년을 반복해 왔던 농사일을 아직도 하고 있다. 하루하루는 반복되고 같은 일이 점차 힘겨워 진다. 매일 몸이 아프고 잘 걷지도 못한다. 아내의 잔소리와 한풀이는 더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매일같이 밭과 논을 갈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남들이 다 뿌리는 농약 한번, 비료한번 뿌리지 않고 그는 묵묵히 농사일을 해 간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30여년 묵묵히 지켜준 친구가 있다. 이름도 없고 말도 못하지만 늙은 농사꾼에게 그만한 친구는 없다. 아무 말 없이 일을 해도 늙은 농사꾼은 소와 소리없는 대화에 힘을 얻는다.

아내의 잔소리, 애정의 표현일 뿐...

아내는 불만이 많다. 소가 죽을까봐 농약을 치지 않아 매일같이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남들 다 주는 비료도 주지 않아 농작물의 수확이 더뎌질 때도 불만이다. 입버릇처럼 "저 소새끼가 죽어야 내가 편할텐데..."라며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소가 너무 늙어 힘이 떨어져 달구지를 끌지 못할 때에는 뒤에서 그 달구지를 밀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은 달구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또다시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반복되는 잔소리는 남편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어느샌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이 섞인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얼마 남지 않는 날에 대한 걱정도 담긴다. 소가 없으면 내년엔 어찌할고...당신 죽으면 나는 농사 못진다...자식 집에서 눈칫밥 먹고 사는니 당신 죽으면 같은 죽을꺼다...잔소리에 담긴 애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도 남편은 묵묵히 소와 함께 논으로 나간다.


너무 늙은 소. 보다 더 늙은 농사꾼

겨울이 다가온다. 늙은 농사꾼은 나무를 하러 늙은 소와 함께 산으로 나간다. 소 달구지에 나무을 한짐 싣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의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지게를 진 농사꾼의 걸음과 닮았다. 맑은 워낭소리가 울리고, 아무 말 없이 걷는 오래된 두명의 벗은 또다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소의 삶의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사꾼. 그러나 그냥 줘도 안가져 간다는 우시장 상인들의 조롱에 "안 팔아!"를 연신 외치는 농사꾼의 고집은 평생을 옆에서 지켜준 소에 대한 마지막 의리였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것들.

조롱섞인 우시장 상인들. 추석에 찾아와 소를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식들. 기력이 다한 소를 대신하기 위해 우시장에서 구입한 젊은 암소. 그리고 망나니 송아지. 영화에서 보여지는 젊은 것들의 모습은 늙어가는 농사꾼과 소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농사꾼과 소는 아무런 불평이나 꾸지람을 하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프기 보다는 아름다워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다시 삶을 이어가는 그들.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죽음을 앞둔 그들이 아니라 늙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젊은 것들이다.


소가 죽었다.

평생을 걸고 있던 고삐를 풀어줬다.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고삐를 풀자, 잠시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조용히 숨을 거둔다. 밭 한켠에 소를 묻었다. 봉분도 쌓았다. 항상 소를 욕하며 잔소리를 하던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늙은 농사꾼은 아무말이 없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마당 한가득 쌓여있는 뗄감을 보며 고마워 한다. 손에 든 워낭은 더이상 울리지 않는다. 옆에 있어야 할 소는 이미 죽었다. 늙어간다는 것의 종착이다. 나무밑에 앉은 늙은 농사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외로워 보인다. 황량한 밭이 농사꾼의 마음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농사꾼은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 그랬듯이 내일도 논과 밭으로 나가 평생 했던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 늙어가는 삶이다. 더 이상 힘들일도, 두려울 것도 없다.
 
소리의 힘.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워낭소리이다. 영화 전반적은 깔려있는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은 그 어떤 영화음악보다 아름다웠다. 개구리소리, 산새소리, 매미소리. 우리가 흘려 들었던 자연의 소리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맑고 투명한 워낭소리. 늙은 소가 농사꾼에게 마음으로 전달하는 소리다. 그 울림은 영화가 끝나고 몇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진다. 늙어간다는 것.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과 같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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