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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4 [워낭소리] 삶과 죽음.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고찰.
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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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픈일이다. 한루 한달 일년 십년 지나가는 세월에 기력은 쇠퇴하고 시간은 빨라진다. 지나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것 처럼 늙어간다는 것도 막거나 정체시키지 못한다. 주변의 변화에 적응이 더뎌지고, 많은 기억과 추억은 그 수명을 다하며 바로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하기 힘들어진다. 늙어간다는 것은 몸이 쇠약해지는 생물학적 슬픔보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더 슬픈일이다.

그것은 기쁜일이다. 생각은 깊어지고 경험은 풍부해지며 사리분별과 상황판단의 근거가 늘어간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가는 기쁨과 내가 창조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 진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벗이 있다면 늙는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기쁨이 배가될수 있다.

워낭소리. 그것은 대화였다.

늙은 농사꾼이 있다.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어 9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몇십년을 반복해 왔던 농사일을 아직도 하고 있다. 하루하루는 반복되고 같은 일이 점차 힘겨워 진다. 매일 몸이 아프고 잘 걷지도 못한다. 아내의 잔소리와 한풀이는 더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매일같이 밭과 논을 갈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남들이 다 뿌리는 농약 한번, 비료한번 뿌리지 않고 그는 묵묵히 농사일을 해 간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30여년 묵묵히 지켜준 친구가 있다. 이름도 없고 말도 못하지만 늙은 농사꾼에게 그만한 친구는 없다. 아무 말 없이 일을 해도 늙은 농사꾼은 소와 소리없는 대화에 힘을 얻는다.

아내의 잔소리, 애정의 표현일 뿐...

아내는 불만이 많다. 소가 죽을까봐 농약을 치지 않아 매일같이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남들 다 주는 비료도 주지 않아 농작물의 수확이 더뎌질 때도 불만이다. 입버릇처럼 "저 소새끼가 죽어야 내가 편할텐데..."라며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소가 너무 늙어 힘이 떨어져 달구지를 끌지 못할 때에는 뒤에서 그 달구지를 밀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은 달구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또다시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반복되는 잔소리는 남편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어느샌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이 섞인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얼마 남지 않는 날에 대한 걱정도 담긴다. 소가 없으면 내년엔 어찌할고...당신 죽으면 나는 농사 못진다...자식 집에서 눈칫밥 먹고 사는니 당신 죽으면 같은 죽을꺼다...잔소리에 담긴 애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도 남편은 묵묵히 소와 함께 논으로 나간다.


너무 늙은 소. 보다 더 늙은 농사꾼

겨울이 다가온다. 늙은 농사꾼은 나무를 하러 늙은 소와 함께 산으로 나간다. 소 달구지에 나무을 한짐 싣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의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지게를 진 농사꾼의 걸음과 닮았다. 맑은 워낭소리가 울리고, 아무 말 없이 걷는 오래된 두명의 벗은 또다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소의 삶의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사꾼. 그러나 그냥 줘도 안가져 간다는 우시장 상인들의 조롱에 "안 팔아!"를 연신 외치는 농사꾼의 고집은 평생을 옆에서 지켜준 소에 대한 마지막 의리였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것들.

조롱섞인 우시장 상인들. 추석에 찾아와 소를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식들. 기력이 다한 소를 대신하기 위해 우시장에서 구입한 젊은 암소. 그리고 망나니 송아지. 영화에서 보여지는 젊은 것들의 모습은 늙어가는 농사꾼과 소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농사꾼과 소는 아무런 불평이나 꾸지람을 하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프기 보다는 아름다워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다시 삶을 이어가는 그들.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죽음을 앞둔 그들이 아니라 늙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젊은 것들이다.


소가 죽었다.

평생을 걸고 있던 고삐를 풀어줬다.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고삐를 풀자, 잠시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조용히 숨을 거둔다. 밭 한켠에 소를 묻었다. 봉분도 쌓았다. 항상 소를 욕하며 잔소리를 하던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늙은 농사꾼은 아무말이 없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마당 한가득 쌓여있는 뗄감을 보며 고마워 한다. 손에 든 워낭은 더이상 울리지 않는다. 옆에 있어야 할 소는 이미 죽었다. 늙어간다는 것의 종착이다. 나무밑에 앉은 늙은 농사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외로워 보인다. 황량한 밭이 농사꾼의 마음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농사꾼은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 그랬듯이 내일도 논과 밭으로 나가 평생 했던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 늙어가는 삶이다. 더 이상 힘들일도, 두려울 것도 없다.
 
소리의 힘.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워낭소리이다. 영화 전반적은 깔려있는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은 그 어떤 영화음악보다 아름다웠다. 개구리소리, 산새소리, 매미소리. 우리가 흘려 들었던 자연의 소리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맑고 투명한 워낭소리. 늙은 소가 농사꾼에게 마음으로 전달하는 소리다. 그 울림은 영화가 끝나고 몇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진다. 늙어간다는 것.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과 같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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