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조금은 생뚱맞을지도 모르는 시작이지만 우선 내가 어떤 과정으로 영화를 접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일단 내 소개를 하자면 연세대학교 원주배움터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며, 조금은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듣는 복학생이다. 특별히 영화를 좋아하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던 중고등학교 시절 주말에 시내 극장을 찾아다니는 것이 내 취미였고, 유일한 소비였다. 친구가 많지 않아 혼자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변 친구들보다는 많은 영화를 섭렵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가난한 자취생이기 때문에 학창시절처럼 극장을 자주 가지는 못한다.
 

                                    그래도 전 아이스크림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IT강국 아니던가. 극장을 가지 못하는 울분을 웹하드 서비스의 코인충전에 풀어내면서 그동안 보아오지 못했던, 그리고 아쉽게 놓쳤던, 또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던 많은 영화들을 폭식할 수 있었다. 장르와 감독과 주연을 가리지 않고 폭식하는 습관은 영화를 본 것인지 혹은 보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6년정도 지난 것 같다. 

영화를 쓴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난 영화가 전공도 아니요, 따로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을뿐더러, 영화비평이라는 범주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글발이 좋지 않다. 그저 영화를 본 후 내 생각과 느낌을 주절거리는 단순한 잡문에 불과하다. 컴퓨터는 싸이와 영화와 메신저밖에 모르던 내가, 이러한 나의 잡문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내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다.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두서없는 시작은 각설하고, 지난주 폭식했던 영화들 중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세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러브레터(이와이 순지감독, 1995년작), 무지개 여신(쿠마자와 나오토 감독, 2006년작), 그리고 이프온리(길 정거 감독, 2004년작).

 

죽음에 대한 영화
이 세편의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러브레터는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가 죽은 연인을 잊어가는 과정을 그렸고, 무지개 여신은 사랑인줄 몰랐던 사람의 죽음 후 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프온리는 연인이 죽을 것을 알게 된 남자의 희생을 다룬 영화다. 개인적으로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나에게 한줄기 눈물의 축복을 안겨준 영화들이기에 참 고맙다.

영화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男)  훈남이다.


죽음은 곧 상실, 그리고 그리움과 슬픔
영화에서 주되게 바라보았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소중함이다. 후지이 이츠키(女)는 동명 동급생이었던 후지이 이츠키(男)의 사랑을 그가 죽고 나서 깨닫게 된다.(러브레터) 오누이처럼 붙어다녔던 토모야와 아오이는 아오이의 죽음으로 그 사랑을 알게 된다.(무지개 여신) 사랑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이안은 사만다의 죽음을 예견한 후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녀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이프온리) 그리고 그 죽어간 이들의 진심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가슴이 동하고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고이지 않는가. 

왜 죽는지 궁금하지 않다. 얼만큼 화려하게 파괴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딱 미국이다.
(영화 트랜스포머)

가치없는 죽음, 그것은 관객의 선택적 판단
그러나 가치없는 죽음도 있다. 물론 영화속이다. 주로 헐리웃에서 만들어내는 블록버스터, 혹은 갱스터 영화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혹은 악당)의 총에 뿜어져 나오는 많은 탄환에 머리가 터지며 죽어가는 그들은 그저 죽는 역할의 배우일 뿐이다.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 우리는 그러한 장면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가령 트랜스포머에서 디셉티콘이 멋지게 변신을 하고 주변의 군인을 학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하는가. 왜 죽었는지 보다 어떻게 죽이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영화 무지개 여신의 아오이와 토모야. 이렇게 이쁜 우에노 주리를 몰라보다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
위의 세 편의 영화에서의 죽음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다들 알겠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후지이 이츠키(男)의 죽음은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다. 아오이의 죽음으로 토모야는 그녀의 사랑을 모른척 했던 죄책감과 미안함에 대성통곡을 한다. 사만다가 죽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까지 알고 있던 이안은 스스로 그 시간, 장소에서 그 방법 속으로 들어가 사만다 대신 죽음을 택한다. 죽음이 가치 있게 되는 순간, 그것은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故 김주익 열사. 돌아가신 후 내 삶은 달라졌다.

죽음의 가치?
이경해 열사가 스스로 몸에 칼을 긋고 돌아가셨다. 배달호 열사는 온몸이 불타는 고통속에서 돌아가셨다. 김주익 열사는 밥을 끌어 올리던 동아줄에 목을 감고 돌아가셨다. 더 멀리 가면 전태일 열사도 스스로의 목숨을 민중들에게 받치셨다. 가깝게는 허세욱 열사가 FTA반대를 외치며 산화하셨다. 수많은 열사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 민중들에게 무엇인가 깨닫게 해 주셨다. 그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그나마 이만큼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분들의 생각에 우리는 눈물짓지 않았는가. 가슴이 찢어질 만큼 고통스럽고 슬퍼서 그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살고 있지 않는가.

                            대학생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오늘 오전에 또 한명의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게 강요받던 여대생은 그 사실에 비관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버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생들이 목숨을 버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그들의 죽음은 그저 용기없는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라 치부하기는 너무나 슬프고 아프고 화가 난다.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들이었겠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따로 있다. 난 많은 대학생들의 죽음을 강요한 것은 현재 MB정부와 썩을대로 썩은 보수층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자 대학만을 원하는 이 나라 모든 대학 당국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넌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더 이상 죽지 말자, 아니 죽이지 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다.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은 하루에 6명씩 죽는다. 수많은 농민들은 비료 값이 오르고 쌀값이 떨어지고 값싼 외국 농산물이 들어올 때마다 죽어 나간다. 그리고 우리 대학생들은 매년 오르는 등록금에 죽는다. 경제위기를 연일 부르짖고 있지만 기업의 곶간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서민의 주머니는 비어가는데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그리고 우리들의 몫
이츠키(男)가 죽고 그 흔적을 따라 가는 이츠키(女)는 그가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고 한방울의 눈물을 흘린다. 아오이가 남긴 러브레터를 본 토모야는 대성통곡을 한다. 죽음인지 알면서도 택시에 올라타는 이안의 눈에도 한가득 고여 있는 눈물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여운에 관객들은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삶은 영화와 다르다. 소중한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같이 아파해야 한다. 영화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물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삶은 그 눈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친구들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두지 말자. 안타깝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영화 속 죽은 이들은 남은 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눈물로 남겠지만, 현실 속 우리들의 삶은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투쟁으로 올곧게 세울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세워야 한다.

 

러브 레터
감독 이와이 슌지 (1995 / 일본)
출연 나카야마 미호, 사카이 미키, 카시와바라 다카시, 토요카와 에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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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여신
감독 쿠마자와 나오토 (2006 / 일본)
출연 이치하라 하야토, 우에노 주리, 아오이 유우, 사사키 쿠라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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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 온리
감독 길 정거 (2004 / 영국, 미국)
출연 제니퍼 러브 휴이트, 폴 니콜스, 톰 윌킨슨, 다이아나 하드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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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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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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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픈일이다. 한루 한달 일년 십년 지나가는 세월에 기력은 쇠퇴하고 시간은 빨라진다. 지나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것 처럼 늙어간다는 것도 막거나 정체시키지 못한다. 주변의 변화에 적응이 더뎌지고, 많은 기억과 추억은 그 수명을 다하며 바로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하기 힘들어진다. 늙어간다는 것은 몸이 쇠약해지는 생물학적 슬픔보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더 슬픈일이다.

그것은 기쁜일이다. 생각은 깊어지고 경험은 풍부해지며 사리분별과 상황판단의 근거가 늘어간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가는 기쁨과 내가 창조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 진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벗이 있다면 늙는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기쁨이 배가될수 있다.

워낭소리. 그것은 대화였다.

늙은 농사꾼이 있다.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어 9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몇십년을 반복해 왔던 농사일을 아직도 하고 있다. 하루하루는 반복되고 같은 일이 점차 힘겨워 진다. 매일 몸이 아프고 잘 걷지도 못한다. 아내의 잔소리와 한풀이는 더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매일같이 밭과 논을 갈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남들이 다 뿌리는 농약 한번, 비료한번 뿌리지 않고 그는 묵묵히 농사일을 해 간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30여년 묵묵히 지켜준 친구가 있다. 이름도 없고 말도 못하지만 늙은 농사꾼에게 그만한 친구는 없다. 아무 말 없이 일을 해도 늙은 농사꾼은 소와 소리없는 대화에 힘을 얻는다.

아내의 잔소리, 애정의 표현일 뿐...

아내는 불만이 많다. 소가 죽을까봐 농약을 치지 않아 매일같이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남들 다 주는 비료도 주지 않아 농작물의 수확이 더뎌질 때도 불만이다. 입버릇처럼 "저 소새끼가 죽어야 내가 편할텐데..."라며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소가 너무 늙어 힘이 떨어져 달구지를 끌지 못할 때에는 뒤에서 그 달구지를 밀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은 달구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또다시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반복되는 잔소리는 남편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어느샌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이 섞인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얼마 남지 않는 날에 대한 걱정도 담긴다. 소가 없으면 내년엔 어찌할고...당신 죽으면 나는 농사 못진다...자식 집에서 눈칫밥 먹고 사는니 당신 죽으면 같은 죽을꺼다...잔소리에 담긴 애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도 남편은 묵묵히 소와 함께 논으로 나간다.


너무 늙은 소. 보다 더 늙은 농사꾼

겨울이 다가온다. 늙은 농사꾼은 나무를 하러 늙은 소와 함께 산으로 나간다. 소 달구지에 나무을 한짐 싣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의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지게를 진 농사꾼의 걸음과 닮았다. 맑은 워낭소리가 울리고, 아무 말 없이 걷는 오래된 두명의 벗은 또다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소의 삶의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사꾼. 그러나 그냥 줘도 안가져 간다는 우시장 상인들의 조롱에 "안 팔아!"를 연신 외치는 농사꾼의 고집은 평생을 옆에서 지켜준 소에 대한 마지막 의리였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것들.

조롱섞인 우시장 상인들. 추석에 찾아와 소를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식들. 기력이 다한 소를 대신하기 위해 우시장에서 구입한 젊은 암소. 그리고 망나니 송아지. 영화에서 보여지는 젊은 것들의 모습은 늙어가는 농사꾼과 소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농사꾼과 소는 아무런 불평이나 꾸지람을 하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프기 보다는 아름다워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다시 삶을 이어가는 그들.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죽음을 앞둔 그들이 아니라 늙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젊은 것들이다.


소가 죽었다.

평생을 걸고 있던 고삐를 풀어줬다.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고삐를 풀자, 잠시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조용히 숨을 거둔다. 밭 한켠에 소를 묻었다. 봉분도 쌓았다. 항상 소를 욕하며 잔소리를 하던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늙은 농사꾼은 아무말이 없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마당 한가득 쌓여있는 뗄감을 보며 고마워 한다. 손에 든 워낭은 더이상 울리지 않는다. 옆에 있어야 할 소는 이미 죽었다. 늙어간다는 것의 종착이다. 나무밑에 앉은 늙은 농사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외로워 보인다. 황량한 밭이 농사꾼의 마음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농사꾼은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 그랬듯이 내일도 논과 밭으로 나가 평생 했던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 늙어가는 삶이다. 더 이상 힘들일도, 두려울 것도 없다.
 
소리의 힘.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워낭소리이다. 영화 전반적은 깔려있는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은 그 어떤 영화음악보다 아름다웠다. 개구리소리, 산새소리, 매미소리. 우리가 흘려 들었던 자연의 소리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맑고 투명한 워낭소리. 늙은 소가 농사꾼에게 마음으로 전달하는 소리다. 그 울림은 영화가 끝나고 몇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진다. 늙어간다는 것.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과 같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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