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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3 [나의 친구 그의 아내] 팔지 말아야 할 양심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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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렇다.

 

둘도 없는 친구. 재문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예준은 그의 절친이자 유망한 펀드매니져다. 지숙은 재문의 아내.

재문과 지숙은 미국이민을 준비하지만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고, 이러한 재문을 예준이 도와준다. 그리고 지숙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예준의 실수로 죽는다. 그 죄를 재문이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게 되고, 그 사이 예준은 그 죄책감에 지숙을 금전적 지원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재문이 출소하고 지숙은 한국으로 돌아와 헤어샾을 열어 성공한다. 예준은 그 사이 회사의 이사진이 되며, 지숙에게 연정을 품고, 재문과 지숙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지숙에게 작업을 건다. 이런 내용이다.

 

내용은 불륜치정드라마. 그러나 그 이면에....

 

위에 썼듯 영화는 중년 성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사랑과 전쟁에 나올 법한 스토리인것 같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단순한 치정드라마를 넘어서는 자본과 인간에 대한 일종의 상황극이다. 그리고 영화는 돈이 가진 힘을 이야기한다. 그 힘은 자신의 절친의 부인을 취할수도 있고, 그 힘에 도취되어 자신을 부정할 수도 있고, 양심을 팔수도 있고, 모든 것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말은 파멸이다. 그 무시무시한 힘은 뒤늦게 깨달은 양심이라는 불길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덫이다.

 

 

영화는 응큼하다.

 

그렇다. 영화는 응큼하다. 남자 둘이 보기에도 민망한 정사 장면도 그렇다. 그러나 그 응큼함 때문에 영화가 응큼해 지지는 않는다. 영화의 응큼함, 아니, 감독의 응큼함은 신경써서 보고 듣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그리고 마치 감독은 '난 불륜 드라마를 찍었는데 왜 그렇게 해석해요?" 라며 되물을 만큼 응큼하다. 그 응큼함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숙이 예준에 대한 마음을 눈치 채고 고민할때 흘러나오는 뉴스의 맨트나, 지숙을 만나고 싶지만 예준이 이간질 하는 사이 고민하고 있는 재문이 보여주는 화면에 나오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현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물질만능주의,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아주 응큼하게 꼬집고 있다. 이 응큼함이 조금 적나라할 정도로 나오는 것은 지숙의 아이를 예준이 죽였다는 것을 알게된 지숙이 재문을 찾아간 장면에서 나온다. 재문은 지숙을 위해, 그리고 예준에게 받은 돈 때문에 아이를 자신이 죽였다 거짓말 하고, 아직 재문을 잊지 못하는 지숙은 그 거짓말은 반박하지 못한다. 지숙에게는 재문보다 예준의 돈과 사회적 위치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괴로워 하는 재문이 술을 마실 때, 재문의 뒤에서 인터넷을 하는 알바생이 보는 동영상은 지난 촛불집회의 영상과 꽃다지의 "반격"이 흘러 나온다.

 

 

그러나 돈은 양심을 이기지 못한다.

 

예준은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영화에 그렇게 나온다. "씨발 대학다닐 때 학생운동했다는 놈이 더불어 사는 사회가 이딴 거냐?" 라는 대사에서 예준은 버럭 화를 낸다. "어짜피 경쟁사회 아닙니까?" 궁핍한 변명이 양심을 감출수는 없다. 감추지 못한 양심은 재문과 지숙의 사이를 갈라놓으면서 재문에게 화를 냈다가 사정을 했다가 울다가 웃는 이 장면에서 그의 정신적 피폐와 돈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 시대 386의 단면을 보여준다. 더욱이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그는 거의 싸이코 패쓰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양심보다는 돈을 택한다. "이 씨발 누구 덕에 다들 살아가는데 지랄이야?" 무심코 던지 그의 말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이 시대의 변질된 양심을 대변한다.

 

그러나, 마지막은 조금 오버다.

 

지숙은 예준을 죽이려 한다. 그를 구해준 것은 재문이다. 그러나 예준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니가 날 속이고 세상을 속인 것 다 니맘인데,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해 져야 하지 않겠어? 니가 그랬으면 좋겠다." 지숙의 대사는 예준의 거짓과 팔아버린 양심의 빈자리의 죄책감을 관통한다. 그리고 결말은 영화속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 자신을 속이고 돈에 양심을 팔아버린 사람이 죽음으로 그 죄를 씻을 각오를 한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돈 따위에 양심을 팔지는 않는다. 돈으로 면죄부를 사지는 않는다. 감독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의 결말은 그저 세상에 타협한, 혹은 돈이라는 물질에 자신의 영혼마저 팔아버린 이 시대 변절자들의 일말의 양심적 선택을 기대하는 환타지일 뿐이다. 관념적이고 끈적거리며 물컹물컹한 덩어리일 수 밖에 없다.혹은, 영화 [오래된 정원]에서 보이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세상으로 돌리는 비겁하고 치졸한 책임전가일 뿐이다.

 

재문과 지숙, 그리고 예준의 관계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끝날줄 알았던 영화는 마지막 재문과 지숙의 재결합과 지숙의 임신 모습을 보여주면 끝난다. 허름한 미용실을 하고 있는 지숙, 그 앞에서 길을 쓸고 있는 재문. 한마디의 대사도 없는 엔딩장면은 예준에게 상처받고,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절대적 권력으로 대변되는 돈에 상처받고 조롱당한 서민의 우울한 일상이다. 이 장면을 우울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던, 돈이 가진 파멸의 힘과 양심을 팔았던 그들, 그리고 살인이라는 극단적 처방을 내린 그들 역시 양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감독 신동일 (2006 / 한국)
출연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 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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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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