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우울한 도시 고담시(Gotham City).

범죄의 도시. 정의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법위에는 마피아가 있다. 도시가 이지경이 되니 검찰과 경찰은 물론 판사들도 마피아를 떠받들며 살아간다. 그런데, 정의의 꽃이라고는 잎도 피지 않을 것 같았던 도시에 밤마다 검은 망토 휘날리며 마피아만 때려잡는 용자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배트맨이다. 그는 정체는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 언젠가 고담시가 정의로운 도시가 되길 바라는 모범시민이다.


그의 앞에 나타난 신임 지방검사 하비 덴트(Harvey Dent). 브루스는 하비의 정의로움에 반해 그가 자신의 꿈을 완성시켜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비에게 던져준 선물. 그것은 후원모금파티.

“말씀은 고맙지만, 3년간은 재선에 안 나갈 겁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제 친구들과 후원모금 파티 한번이면 평생 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 파티에서 브루스는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 I believe in Harvey Dent." (전 하비 덴트를 믿습니다.)


 

여기는 이상한 도시 원주.


건강도시, 혁신도시, 첨복도시. 잘 모르겠지만 대략 이런 도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한나라당 공천만 받으면 덜컥 당선되는 이상한 도시.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무장한 체 배째라며 주민들 농락하고 뒤로는 건설사 발바닥 핥아가며 골프장이나 지어주는 아주아주 이상한 도시 원주. 그런데, 이런 이상한 도시에 언젠지 모르게 나타난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매일같이 경찰과 싸우기도 하고, 한겨울 아스팔트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남들 출근시간에 커다란 피켓을 들고 매연 가득한 도로 가운데 망부석처럼 서있기도 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불의에 저항하는 원주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민들에는 항상 주황색 점퍼 휘날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민주노동당이다.


노동절 원주 집회에 참석한 자랑스런 우리 민주노동당!!

그리고 그 민주노동당은 2010년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6월 2일 지방선거. 시장 후보와 기초의원 후보 2명, 비례후보 1명이 출사표를 던진 민주노동당은 이번 지방선거에 총력을 기울여 당선이라는 성과를 보이고자 한다. 썩어가는 지역정치판을 엎어버리고 시민이 주인되는 새로운 지역정치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전화가 한통 걸려 왔다. 이번 선거예산으로 사용할 특별당비를 낼 수 있겠냐는 의사확인전화였다. 10만원의 특별당비를 이야기하며 한숨과 사과를 반복한다. 그 한숨과 미안하단 말에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특별당비를 약속하고(일단 5만원으로 하자 했다), 10만원을 선뜻 내지 못한 내 소심함에 또 한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새삼스레 하비 덴트가 부러워 졌다. 그러나, 하비 덴트에게 평생 돈 걱정 안할 파티를 열어줬던 브루스는 우리당엔 없다. 그렇다고 기업들이 주는 정치자금을 덥석 받아먹을 당도 아니다. 물론, 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한 달 1만원도 부담스러운 당원들에게 특별당비 10만원을 권하는 선본원의 마음이 무거운 것은 당연하겠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6월 2일로 날아가 본다. 민주노동당 선거사무실은 축제분위기다. 시장은 물론 기초의원과 비례의원까지 모두 당선이 되었다. 한나라당의 표밭이라고 했던 강원도에서 당원들의 땀과 눈물로 일궈낸 감격적인 승리다. 모든 언론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오고 여기저기 카메라 플래쉬가 터진다. 당선자 4명은 서로의 손을 잡고 만세를 부르며 희망찬 원주를 만들어갈 포부를 밝힌다. 이 모든 성과가 당원들과 원주시민들의 도움이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수많은 당원. 그리고 시민들도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모두 한 목소리로 외친다.


 

“우리는 민주노동당을 믿습니다!”

그리고 원주에서는 진보청치의 꽃이 피기 시작하겠다.


 

그러니, 우리 이런 행복한 날을 위해서, 혹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끊었다 반복하며 한숨짓는 선거운동본부 상근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당을 알리기 위해 새벽부터 늦밤까지 고군분투하는 후보자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특별당비를 내는 것이 어떠할지(우리 모두 브루스 웨인이 될 수 있다는 거) 뻔뻔하게 제안해 본다.




이 글은 민주노동당 원주시위원회 소식지에 실린 글입니다

 

지풍산의 영화세상(http://ewmsi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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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아바타]열풍이다. 한국 누적 관객 수가 천만에 육박하고, 전 세계에서 벌어드린 돈이 16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런 기세라면 제임스 카메론감독의 전작 [타이타닉]의 기록은 쉽게 돌파할 것이다. 그러나 흥행과 더불어 논란도 광풍이다. 미국 보수진영에서는 현 민주당 정권에게 힘을 실어주는 영화라 비판하고, 바티칸에서는 자연숭배를 조장하는 비기독교적 영화라 내뱉었다. [원령공주], [늑대와 춤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포카혼타스] 등의 영화를 노골적으로 표절했다는 주장도 퍼지고 있다. 그런데 왜 영화의 흥행은 멈추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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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의 이야기

 

지구의 자원위기로 “판도라”행성의 자원을 캐러 온 인간들은 원주민 “나비”족과 대립한다. 교섭은 실패로 끝나고 군산복합체는 무력으로 수억년 공존했던 “나비”족과 그들의 자연을 침략한다. 그리고 “나비”족은 아바타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 “제이크”와 함께 인간들과 마지막 결전을 치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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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의 힘

 

[아바타]는 블록버스터에서 놓치기 쉬운 이야기를 명쾌하고 짜임새 있게 담아냈다. “홈트리”가 무너질 때 관객은 눈물짓고 “쿼리치”의 최후에서 관객은 환호한다.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수줍은 사랑도 영화 속 큰 재미이다. 그러나 [아바타]의 진정한 힘은 시각적 향연이다. 3D상영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답게 시각적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영화는 162분이라는 길고 긴 상영시간 내내 관객이 스크린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 힘이 [아바타]의 흥행 돌풍의 주역이다.

 

 

[아바타] 최고의 재미

 

흥미롭게도 [아바타]의 최고의 재미는 영화 속에 있지 않다. 영화 속 수많은 명장면이 무색할 만큼 뻔뻔하고 웃기며 희한한 기사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나비”족 학살이 조지 부시의 이라크전쟁을 연상시키며 이것은 곧 미국이 전쟁광, 환경파괴범으로 그려지는 것이고 특히 군산복합체를 악의 근원으로 보게 되고, 이는 민주당에게 꿀 같이 달콤한 영화일 것”이라는 미 보수진영의 비판이다. 아니, 잘 생각해 보자. 그들이 비판한 내용은 사실아닌가. 명분없는 이라크 전쟁으로 중동지역 오일패권을 장악한 그들이다. 군산복합체의 떡고물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그들이다.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서 지구를 병들게 하는데 책임은 아주 조금 지고 있는(그나마도 떠밀려서) 그들이다. 그래, 니들 말이 맞다. [아바타]는 그 사실을 아주 조금 영화에 반영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의 배급은 20세기 폭스(미국의 대표적 보수언론 폭스뉴스와 같은 계열사)가 맡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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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의 진실

 

[스파이더맨3]가 생각난다. 기름으로 더럽혀진 미국(블랙 스파이더맨)에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미국(원래 스파이더맨)으로 돌아오고, 중동(샌드맨)은 스스로 반성하고 미국에게 사과해라 라는 더러운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영화다.(http://ewmsis.tistory.com/5)

[아바타]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영화는 인간을 악으로 규정하지만 이에 대항하는 “나비”족은 자연과 공존할 뿐 스스로를 지킬 힘을 지니지 못한 존재다. 결국 그들은 “제이크”를 통한 구원을 바라며 갈등 해소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의 위치만을 고수한다. 이것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보여진 백인 메시아주의의 연장이며, 나아가 ‘원주민’들은 평화를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수동적 존재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이미 수동적 존재로 규정되어진 “나비”족의 영화 속 승리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3부작으로 기획된 이 영화의 시작은 열면 절대 안되지만 너무나 탐이 나는 “판도라 상자”를 “제이크”를 통해 살짝 열며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이미 예견된 침략과 점령의 출발점이다. 모습은 같으나 본질이 다른 존재, “제이크”는 “나비”족의 구원자이며 종말자다. 그리고 이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속성과 동일하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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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색다르다.

영화 초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지만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우주선이 불시착했다는 설정만으로도 재밌다. [반지의 제왕]으로 명예와 부를 동시에 얻은 피터 잭슨이 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만발이었다. 어떠한 내용인지, 그리고 무슨 영화인지도 모른체 관람한 [디스트릭트 9]은  영화시작 30여분만에 개인적인 SF영화 순위 상위권에 링크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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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평화로운 도시 요하네스버그. 어느날 거대 우주선이 도시 하늘에 나타나 미동도 하지 않는다. 궁금해진 사람들은 우주선에 들어가는데 수많은 외계인들이 그 안에 고립된 체 표류하고 있었다. 아마 어떤 이유로 불시착을 한 듯 하다. 사람들은 외계인을 도시 외곽에 수용하고 공존을 결심한다. 그리고 20년이 흐르고, 더 이상 외계인들은 신기한 존재도, 공존의 대상도 아닌 우리와는 "다른"존재일 뿐이다. 수용된 구역은 슬럼화 되고 도시의 암덩어리로 전락한다. MNU산하 외계인 담당부서는 이들은 보다 먼 곳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외계물질에 노출된 주인공은 서서히 외계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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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는...

전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으나 몇가지 특별한 점을 짚어 본다면, 첫째로는 구성방식이 참신하다. 시작부터 인터뷰장면을 편집하여 20여년간의 외계인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끝까지 다큐를 보는 듯한 편집으로 사실성을 부각한다. 당연히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영화에 대한 몰입도는 그 구성으로 만들어낸 사실성만큼 높아진다. 비슷한 영화로 [클로버필드 (j.j 애브라함 감독 2006년작품)]를 떠올릴 수 있다. 두번째, 외계인이 등장은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아니다. 주인공의 변태과정과 외계인들을 박해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그 중심이다. 즉, 외계인과의 전쟁이나 갈등이 아닌, 외계인을 매개로한 인간들의 모순이 주된 이야기다. 비슷한 영화로 거대 쓰나미를 인물들의 갈등과 화해의 촉매제로 사용한 [해운대(운제균 감독 2009년작품)]가 있다. 세번째, B급정서가 가득 담겨있다. 물론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치고는 시각효과도 뛰어나고 물량공세도 어마어마하다. 상대적인 저예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영화 속 전투장면에서 폭발하는 사람이나 사지가 찢겨나가는 사람 등의 장면은 피터잭슨이 [데드얼라이브 (피터잭스 감독 1991년 작품)]에서 보여준 그의 취향을 듬뿍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제왕 (피터잭슨 감독 2001년 작품)]에서 보여준 막힘없는 내러티브 능력도 놓치지 않았으니 그저 흐믓하게 관람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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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중요한 것은 영화 전반적으로 깔린 인간들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다. 우리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의 능력에 대한 질투는 그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그들의 무기는 우리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능력도 우리보다 월등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고 우리는 다수다. 그들이 번식하는 것을 경계하고 우리와 섞이는 것을 차단한다. 놓은 철조망 속의 그들은 제거의 대상이며 골치덩어리이자 우리들이 우주에서 가장 월등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눈에 가시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주인공은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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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는...

시선을 조금만 넓게 본다면, 영화 속 외계인들은 그냥 외계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외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에 수용된 외계인. 그들이 갖힌 디스트릭트9. 영화에서 감독은, 혹은 제작자인 피터잭슨은 다수인 우리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어두운 시선을 멀리서 관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비약해 본다면, 우리 주변에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디스트릭트9"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고, 먹이를 던져주면서 자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 볼만하다.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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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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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카신발. 머 같구나 대한민국.



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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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재난영화라 시끄럽던 [해운대 (윤제균감독 2009년작품)]가 벌써 800만 관객돌파라는 성과를 올리며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관람을 한 것은 개봉 후 어느정도의 관객평이 인터넷에 올라올 무렵. 정말로 알바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은 극단적으로 갈리더라. 몇편의 리뷰를 보고는 객관적인 판단력을 흐릴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이후 [해운대]에 대한 모든 기사와 리뷰를 끊고 영화를 보는 날까지 개대도, 걱정도 접어두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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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보다 드라마에 집중

그러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감독의 선언이 틀리지 않았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사연과 사랑과 갈등을 그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박중훈의 "메가쓰나미"걱정 장면이 없다면 주말드라마, 혹은 여름특집단막극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쓰나미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기제일 뿐, 그 자체가 주된 것은 아니다. 많이 비교되는 [투머로우(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2004년작품)]에서 지구 온난화로 인한 빙하기가 다가오는 장면이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과는 상이하다. [해운대]는 스케일과 스펙터클에서 [투머로우]에게 밀리지만, 그것을 버린 대신 우리네 이웃의 이야기로 꽉 채운다. 그리고 감독이 이러한 선택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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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쉬리(강제규 감독 1999년작품)]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는 그 양과 질이 모두 성장하였다. 감히 상상도 못했던 스케일과 CG로 한국영화의 절정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는 CG의 양으로 승부했던 많은 영화들의 참패로 얼룩지기도 하였다. 최초의 어드벤처 무비를 표방했던 [아유레디(윤상호 감독 2002년작품)]의 대참패와 본격 SF영화 [내츄럴 시티(민병철 감독 2003년 작품)]의 실패.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장선우 감독 2002년 작품)], [예스터데이(정윤수 감독 2002년작품)], [2009 로스트메모리즈(이시명 감독 2002년 작품)] 등의 스타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던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왔다는 걱정마저 나돌게 되었다. 보다 새롭고 참신한 시각적 효과는 이미 헐리웃의 영화들로 인해 관객의 눈이 높아진 것도 있겠지만, 보다 정확한 참패의 이유는 이야기의 부족이었다. 즉, 영화의 내러티브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드라마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산만하게 배치된 CG가 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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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장르영화는 뜨지 못하는가.

기존의 공식, 관습, 도상적인 틀에서 그 이야기만 조금씩 바꾸는 헐리웃의 장르영화는 꾸준히 재생산된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본 듯한 장면들로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신나게 영화들을 포식한다. 그러나 유독, 헐리웃의 장르적 특성을 되새김질한 한국영화들은 커다란 흥행을 하지 못한다. 특히 제작비용과 시간투자가 비대한 블록버스터의 경우는 열에 아홉은 그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싸이렌, 단적비연수, 화산고, 천사몽, 퇴마록, 튜브, 원더풀데이즈, 청풍명월, 역도산, 청연, 황진이, 태풍, 형사, 중천.
연도별로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제작비 대비 흥행실패작 들이다. 혹자는 제목조차 모를 수도 있는 영화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당시(제작년도)에 평균 제작비의 두배 이상의 돈을 쏟아부은 블록버스터였다. 하지만 관객들은 비주얼의 완성도보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한국에서 먹히는 영화  소재.

뭐, 대부분의 관객이라면 동의하겠지만, 성공한(흥행기준) 영화의 대부분의 소재는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역사를 소재로 하거나 둘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소재를 사용한 영화들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한반도] 등의 역사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그 흥행을 절반이상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이 어쨌든 간에 역사소재의 영화는 많은 관객의 호응을 얻어낸다. 더욱이, 먼 역사보다 가까운 역사일수록 그 효과는 커지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먼 역사를 다루면서 현재 한반도의 국제적 정세를 살며시 끼워 넣고 애국심까지 고취시키는 영화들도 등장하고 있다. [신기전], [황산벌] 등이 그런 맥락의 영화이다. 두번째인 소소한 일상의 소재는 [괴물]로 대표된다. 물론, 영화의 해석에 차이에 따라 [괴물]이 반미영화일수도 있고, 광주항쟁을 그린 영화라 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관객에게 어필했던 것은 바로 우리 이웃과 같은 서민들이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설정이었다. 또한, 한국 최초의 괴수영화, 더욱이 헐리웃의 장르적 특성을 모두 뒤틀어 버리면서 우리들만의 독특한 감성을 담아낸 것 역시 영화 성공의 주요한 이유였다. (물론 당시 1천만 관객 돌파는 거대 자본의 제작, 배급, 상영의 삼박자가 잘 맞아 떨어진 것도 있지만, 이것이 이후 이야기하자) 더 가까이에는 [추격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추격자]는 유영철과 강호순으로 연쇄살인 이라는 화두와 맞물려 흥행물살을 탔던 영화이다. 19세 미만의 폭력적 장면이 난무하는 스릴러였던 [추격자]는 소소한 일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누구도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공포에 공감하는 분위기로 관객들에게 어필됐다. [우생순]은 아줌마 국가대표들의 삶의 고닮픔을 그리면서 애국심까지 고취했던 탁월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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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로 돌아가자

[해운대]는 위에서 이야기 한 조건 중 두번째 조건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네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가 영화의 70% 이상 차지하고 인물들간의 갈등의 해소를 위한 장치로 쓰나미를 사용한다. 다가올 것이 예상되는 비극을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 비극의 존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영화 인물들의 사랑과 다툼, 갈등과 화해에 집중한다. 어쩌면 몇몇의 등장인물들이 쓰나미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쓰나미로 인한 공포나 인물의 죽음이 가슴아파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1시간 30여분의 인생과 사연에 안타까움으로 흘리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혹자는 우연이 너무 많다, 많은 등장인물들을 연결시키기 위한 작위적 설정이 많다라고 불평을 터뜨리지만, 잘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삶은 영화보다 더 복잡하고 징그럽게 얽혀있지 않은가. 그 복잡다단한 삶을 두시간에 이만큼 집약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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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재난영화의 시작

별다를 것은 없다. 굳이 "한국형" 이라 말하는 것도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헐리웃 거대자본의 대작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정서가 담겨있기에 "한국형" 이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해운대]에서 보여준 것은 "우리도 이만큼 할 수 있다"라는 소극적 자부심이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다"라는 적극적 자존심이 더 어울린다.. 그렇기에, [해운대]를 바라보는 관객은 같이 웃고, 울면서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해운대
감독 윤제균 (2009 / 한국)
출연 설경구, 하지원, 박중훈, 엄정화
상세보기





Posted by 지풍산
:

태어나서 별로 싸운 적이 없는 나는, 굉장히 쑥스럽게도 겁이 많다. 겁이 많아서 시비가 걸려도 스스로 몸을 사리는 편이다. 물론, 철없던 중고딩시절에 저글같이 같이 몰려다니며 몇 번의 폭력과 싸움을 도도하게 관망했던 적이야 많다.(참여하지는 않는다. 난 겁이 많으니) 이 경험은 아직 철없었던 20대 초반, 나의 활약상이자 마초적인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수많이 변용되곤 하였다. 그러나 내가 중고딩시절 경험했던 폭력은 역시 딱 중고딩 그 정도의 수준에서 끝나는 촌극이었을 뿐,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청소년의 강력범죄의 정도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누구를 싫어서, 혹은 입을 막기 위해서, 돈을 뺏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해 본적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글을 쓰지도 못하고, 어느 으슥한 골목길을 누비거나, 큰 학교에 들어가 매일 30분씩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을 게다. 
 
나는야 진정한 평화주의자 비폭력을 지향하는 사람. 10년전 이렇듯 선하게 생겼으니...


진정한 평화 비폭력을 지향하는 지풍산, 폭력을 말하다

사진을 보고 느낀 분노와 짜증은 일단 진정해 주시길 바라며, 본격적으로 영화이야기를 해보자. 오늘 주되게 바라볼 영화는 [파이트 클럽(1999년 데이비드 핀처 작품)]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년 코엔형제 작품)], [똥파리(2009년 양익준 작품] 이다. 이 세편의 영화의 공통점은 딱 하나. 바로 폭력이다. 각 영화는 폭력을 중요한 영화적 기제로 사용한다. 한편씩 살펴보자. 참, 일단 이 글을 읽기전에 위에 언급한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살며시 창을 닫기를 권장한다. 스포일러가 많은 글이다.

현실의 압박을 벗어나는 수단의 폭력


[파이트 클럽]은 1999년 세기말적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영화다. 삶의 즐거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잭은 어느날 비행기에서 타일러 더든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아주 우연하게 그날 밤 자신의 아파트가 화재로 사라지고 더욱 우연하게 타일러 더든과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없는 모든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타일러의 매력에 빠져든다. 아무 이유없이 자신을 힘껏 때려보라는 타일러. 잭은 폭력의 매력에 빠져들고 그들의 이유없는 싸움은 곧 미국 전역에 "파이트클럽"이 조직된다. 매주 하루씩 지하실에 모여 서로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그들은 광기어린 타일러 더든의 테러계획을 동조하며 군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속하는 모든 시스템의 원흉인 금융회사의 건물을 폭파한다.

            피흘리며 얻는 쾌감. 그것은 폭력을 미화하기 위한 변명이다.

삶의 탈출구, 그것은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

[파이트클럽]에서 폭력을 나누는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다람쥐 쳇바퀴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든 남성들이다. 그들은 온몸에 부숴저라 싸우고 승부에 상관없이 그 폭력의 카타르시스에 빠져든다. 구속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폭력으로 외친다. 그리고 그 광기어린 폭력은 개인간의 소통을 넘어서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로 치환된다. 그리고 미국사회를 구속하고 있는 금융시스템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모든 은행 및 금융회사를 폭발시키며 밀레니엄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이유없는 폭력과 테러는 타일러 더든의 깨알같은 언변에 의한 눈속임을 뿐, 진정한 저항과 투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잡는 손짓이며, 의미없는 폭력의 악순환일 뿐이다. 그것은 타일러 더든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과,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잭의 망상일 뿐이라는 결론이 영화 속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잭이 타일러요, 타일러가 잭이다. 타일러는 잭이 만든 망상에 불과하다.

구속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그러나 잭은 그러지 못했다.

잭은 자동차 사고 조사원이다. 미 전역 자사의 차가 사고가 난 곳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한다. 시차에 시달리고 불면증이 있으며, 사람과의 개인적 만남은 전무하다. 가구구입중독증이 있으며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한다. 구속하는 모든 것은 그에게 스트레스이며 불면증의 원인이다. 홀연히 나타난 타일러 더든은 잭의 분신이며 또다른 자아였다. 그러나 스스로 억제하고 있던 모든 감정이 뒤섞여 나타난 타일러라는 망령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수위의 폭력으로 진화한다. 결국, 자신이 타일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잭은,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몽롱했던 가수면상태에서 벗어난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마지막 그의 말은 구속하고 있던 모든 것에 저항하려 하지 않았던 그의 비겁함을 깨버린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비록 비겁한 폭력의 사도였던 타일러의 테러 계획이었지만, 타일러를 제거하고 맞이하는 밀레니엄의 테러는 결과론적으로 비겁한 폭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 또 다른 남자는 삶의 수단이 폭력이고 살인이다. 그의 살인에는 이유가 없으며, 그저 그래야 하기 때문에 살인을 한다. [노인을 위한 영화는 없다]는 돈가방에 얽힌 영화지만, 적절한 주인공도, 적절한 이유도, 적절한 합리성도 찾기 힘들다. 단지 살인으로 말하는 한 인물에 대한 건조한 관조일 뿐이다.

   바로 이 사람이 그 사이코패스 살인마다. 캐스팅 정말 잘했다.

돈에 얽힌 남자들. 그리고 드러나는 폭력성

한 남자(르롤린)가 사막을 지나다 돈가방을 획득한다. 그리고 도망간다. 탈옥한 연쇄살인범(안톤, 위 사진)은 조직의 청탁으로 그 돈가방을 찾기 위해 남자를 쫓는다. 그리고 그 두명을 쫓는 늙은 보안관(에드). 이 세명에 대한 이야기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줄거리다. 안톤은 르롤린을 찾기위해 쫓아가지만, 어느 순간 그 목적을 상실한다. 돈가방은 중요치 않다. 단지 도망가는 르롤린을 잡아 죽이는 것이 주된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를 잡아 죽이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는 알지도, 알 필요도 없다. 안톤은 르롤린을 잡지 못한다. 도망가던 르롤린은 안톤을 고용했던 조직의 상대 조직에게 살해당한다. 그 이후 안톤은 자신을 고용한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그 보스의 수하를 죽이고, 심지어는 르롤린의 아내에게까지 찾아가 그녀를 죽인다. 그리고 담담하게 그것이 숙명이라 이야기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르롤린의 아내는 무슨 죄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안관

르롤린과 안톤의 흔적을 찾는 보안관 에드는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노인이다. 그는 안톤도, 르롤린도 잡지 못한다. 그들의 흔적만 쫓는다. 그리고 안톤의 살인을 보며 그를 이해해 보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이유도 없지만, 설사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폭력과 살인이 만연한 그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에드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할 곳이 없다는 결론을 짓는다. 이것은 세대와 세대의 단절이며 시대 법과 질서의 혼란이며 폭력에 대처하는 공권력의 모습자체에 대한 회한이다. 그리고 폭력과 살인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 바로 돈이 세상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된 이시대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다.

마지막 안톤의 행동. 그것은 극적인 반전 혹은 당연함

에드는 돈을 가지고 도망가 결국 가족까지 위험에 빠뜨린 르롤린에 대해 비판적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안톤의 이유없는 살인에 대해 인간적 회의에 빠린다. 결국 아름다운 노년생활의 시작을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시작한다. 안톤은 이유없는 살인, 그리고 상실된 목적을 위해 르롤린의 아내에게 찾아간다. 그녀를 죽이고 나오던 안톤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팔뼈가 피부밖으로 튀어나오는 심한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오는 두 소년. 괜찮냐 묻는 그 소년들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봤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며 건낸 100달러 한장에 유유히 사라진다. 그리고 서로 나눠가지기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결국 영화는 물질만능주의의 미국 자체를 비판한다. 그리고 이유없는 살인마 안톤 역시 돈의 노예임을 밝힌다. 사이코 패스 살인만의 마지막 인간적 협상은 영화가 끝나도 관객을 찝찝하게 만드는 반전이다.

여기서 잠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 젖어있는 이시대 변질된 일부 386세대에 대한 일침을 가한 장면을 소개한다. 영화는 [괴물 2006년 봉준호 작품)]이다. 경찰에 쫓기던 박남일은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이를 발견한 노숙자가 그를 자신의 허름한 처소에 눕혀 간호한다. 아침에 일어난 박남일. 노숙자의 빈 소주병과 배낭을 챙기며 "내가 돈은 준다" 라며 지갑을 건내자 노숙자는 빈 병으로 박남일의 머리를 가격하고 "이 새끼가 돈이면 다 되는줄 알아.."라며 일침을 가한다.

  아프겠다.

폭력으로 파괴된 가족의 이야기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가족영화다. 그리고 양익준의 영화다. 감독이 연기하는 상훈은 어느 뒷골목에서 갖 튀어나온 건달이다. 어색함이 없어 그의 전직이 궁금하기까지 하다. 어쨌든, 이 영화. 폭력과 욕설로 치장하고 있는 [똥파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지만 감춰진 가정폭력에 대한 경고이다.

      상훈은 따뜻하다. 그래서 더 슬프다.

상훈과 연희는 둘 다 가정폭력의 희생자다. 상훈은 그 폭력을 이기지 못해 건달이 되었고, 연희는 그 폭력을 견디며 힘들게 살아간다. 누구보다도 가족의 정이 그리운 상훈은 그럴수록 더 폭력적이 되고, 더 거칠어 진다. 그의 폭력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이며 그 핏줄이 더럽게 아픈 것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미움이다. 영화는 상훈에게 세상과, 그리고 아버지와 화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은 변화의 시작은 가족을 다시 가질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의 빛과 따뜻한 한조각 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연희 동생 영재(오른쪽) 그는 영재이지만, 상훈의 어린 시절과 동일하다.

되물림 되는 폭력. 상처받은 가족.

[똥파리]가 단순히 가족의 중요함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정폭력의 되물림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가 더 크다. 상훈은 15년만에 출소한 아버지와 배다른 누나, 그리고 조카와 연희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을 찾는다. 그리고 건달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며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러나 연희의 동생인 한영재는 다시 시작되는 폭력의 악순환의 시작이다. 월남 찬전용사지만 아내가 죽고 정신줄을 약간 놓은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 영재는 상훈이 일하는 용역회사로 들어온다. 그리고 착한 심성을 감추고 폭력에 익숙해져 간다. 상훈의 뒤를 이을 것은 자명하다.



위 세편의 영화는 폭력을 각기 다른 수단으로 사용한다. [파이트 클럽]은 폭력으로 삶을 탈출하고자 하는 정신분열적 인간들을 보여주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돈을 둘러싼 폭력으로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이코패스를 통해 인간성이 상실된 건조한 미국을 그린다. [똥파리]는 끊이지 않는 가정폭력의 악순환과 그 폭력의 슬픔을 밀도있게 그려나간다. 그러나 이 모든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사회의 구조를 부숴버리기 위한 타일러 더든의 테러는 허상이며 망상이었고,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안톤은 결국 돈이라는 굴레 속에 목적을 상실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다.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상훈은 그 가족이 될 수 없으며, 그의 죽음과 동시에 영재라는 새로운 상훈이 비극적으로 탄생한다. 결국 모든 폭력은 그 이유가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하더라도 그 근원은 비겁하다. 다람쥐 쳇바퀴 속의 잭의 비겁함으로 나타난 타일러 더든, 가족을 위한다는 이유로 돈가방을 가지고 도망가다 죽어버린 르롤린과 그를 못죽이자 그의 아내라도 죽여야 한다는 안톤. 아버지의 폭력으로 여동생을 잃은 상훈의 뒤틀린 폭력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더욱 섬뜩한 것은 그러한 폭력은 단절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또 누군가에 의해 다시 살아나고 시작되는 것이다.

2009년 대한민국은, 그러한 폭력이 다시 살아났다.



2009년 우리는 영화 속 극단적 폭력보다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더 섬뜩한 것은 그 폭력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폭력의 끝은 비극이다.

2009년. 나는 그 분의 비극을 꿈꾼다.


파이트 클럽
감독 데이비드 핀처 (1999 / 독일, 미국)
출연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미트 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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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07 / 미국)
출연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조쉬 브롤린, 켈리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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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감독 양익준 (2008 / 한국)
출연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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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

[다빈치코드]에서 예수의 후손을 지키기 위해 이도 저도 아닌 단서로 머리를 굴리던 짜맞추기 달인 랭던교수가 돌아왔다.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도발적이고 직접적으로 구교를 공격한다. 물론, 종교자체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구교의 강력한 권력, 그 권력에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구교에 대한 적개심은 양념일 뿐, 까보면 개인의 욕심과 빗나간 신념으로 일어나는 비극적 살인사건을 밝히는 수사물일 뿐이다.

책을 읽었을 때 궁무처장 역은 호아킨피닉스가 어울릴듯 했는데 이완맥그리거도 나쁘진 않다.


문제는 교황의 비서인 궁무처장이다. 반물질이라는 빅뱅을 가능케하는 실험에 교황청이 참여한 사실을 알고 독실한 궁무처장은 신의 영역을 넘보려는 교황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려 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옛날 교황청에게 박해받은 "일루미나티"라는 과학자들의 모임을 부활시키고, 그 위기를 자신이 구하는 것 처럼 조작하여 스스로가 교황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교권을 확립하려 획책한다. 그러나 그 음모는 똑똑하고 잔머리 짜맞추기 대마왕 랭던교수에게 들통나게 된다.

반은 악마, 반은 천사.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이 가득 담긴,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신념을 위해서는 그 방식이 옳지 않더라도 끝까지 밀어부치는 결과론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 그는 살인을 통해 구교를 정화시키려 하였고, 마지막 몸을 불태우면서도 신에게 구원을 구걸한다. 대의를 위한 살인. 정화를 위한 순교. 그리고 정의와 불의의 혼재. 그 안에서 나약한 인간의 잘못된 선택은 도덕적이어야 할 종교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러나, 진실은 역시 감추어지고, 구교의 흔들린 도덕성은 심판조차 받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안쓰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객관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이다. 인터넷 누리꾼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거기에 자살이라 하니) 당황스러워 하다 타살음모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여권과 청와대의 실세들은 조문을 왔다 쫓겨나가고, 전국의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영화 이야기하다 갑자기 이 무슨 이야기인가?

일단, 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노무현 지지자가 아니다.(당연하지)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권 시절 수많은 집회와 시위에서 경찰들에게 맞은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릴 정도다. FTA를 추진하고, 수많은 노동열사들의 죽음을 종용했던 그를 내가 좋아할리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보를 전달했을 때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은 없었다. 단지, 그가 안쓰러웠다. 역대 대통령 중 깨끗한 도덕성을 지닌 대통령이 있는가.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이명박 대통령만 봐도 정답은 나온다. 그런데 왜 그는 죽음을 선택할 것일까.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큰 도둑이 못되서 죽었다" 라고 하던데 맞는 말 같다. 이 안쓰러운 죽음에 대처하는 이명박 정권을 보아라. 무엇이 두렵워 이러고 있는가.

영화 속 바티칸 지하에서 발견된 반물질 폭탄.

[천사와 악마] 영화 속 궁무처장은 스스로가 숨겨놓은 폭탄을 스스로 처리하면서 자신을 기적의 사나이로 만들려 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교황으로 추대될 것임을 계산하고 자신의 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여기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신의 뜻이다.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살인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는 그들은 신의 뜻을 벗어난 죄인이다. 죄책감은 없다. 독실한 종교적 신념은 광기로 번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는 이명박 정부의 꼬라지

이명박 정부는 사면초가다. 박정희때는 경제라도 살아났지 않았는가(그를 옹호하지 않는다). 근데 이명박은 아무것도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희망이 안보인다. 삽질 정부, 공안정부, 그리고 반민주주의 정부. 한 국가의 CEO가 되고자 했던 그의 신념은 이제 광기를 넘어서 헛짓거리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위의 사진이 바로 그의 (그리고 그의 정부)실체다. 무엇이 두려워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것이냐, 아니면 국민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것이냐.


                      오늘(25일) 오전 북이 핵실험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주말 모든 예능프로를 결방시키고 모든 포탈 사이트를 검게 바꾸었다. 그리고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언론들도 대서특필하며 그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뉴스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오늘(25일) 오전을 기점으로 헤드라인은 바뀌었다. 북의 2차 핵실험소식이 전해지자 사탕에 개미 꼬이듯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YTN뉴스를 4시간동아 보고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뉴스 마지막 한꼭지로 전락해 버렸다. 하긴, 청와대와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책임론과 국민적 질타를 한번에 묻어버릴 좋은 기회이긴 하다. 이명박에게 이것은 호재일 수 있다. 마치 용산참사를 뭍어버린 강호순 처럼 말이다. 보수언론의 공세를 그냥 믿을 국민은 많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궁무처장. 그는 나쁜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타살 음모설은 그런 고민을 낳았다. 신이 되려 했던 궁무처장은 방법보다 결과를 위해 신념을 광기로 뒤틀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은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조사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문 분향소를 봉쇄했다. 북의 핵실험으로 모든 보수언론이 기사의 꼭지를 비틀었다. 진실을 알기에는 우리가 접하는 매체는 너무나도 많다. 눈 뜨고, 귀열고, 마우스를 잡으면 초 단위로 쏟아지는 기사에 무엇이 진실이고 중요한지 판단이 흐려진다. 그러나 하나만 기억하자. [천사와 악마]에서 궁무처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교의 번영이었고, 그 목표를 위해서 도덕적 타락은 중요치 않았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 방법을 과연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진실이 두려워 감추려는 그들의 더러운 방법을 꿰뚫어 보는 것은 우리들의 깨끗한 도덕성이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더러움은 깨끗함을 가릴뿐, 없애지 못한다.


천사와 악마
감독 론 하워드 (2009 / 미국)
출연 톰 행크스, 이완 맥그리거, 아옐렛 지러, 스텔란 스카스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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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


나는 누구일까
조금은 생뚱맞을지도 모르는 시작이지만 우선 내가 어떤 과정으로 영화를 접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일단 내 소개를 하자면 연세대학교 원주배움터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며, 조금은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듣는 복학생이다. 특별히 영화를 좋아하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던 중고등학교 시절 주말에 시내 극장을 찾아다니는 것이 내 취미였고, 유일한 소비였다. 친구가 많지 않아 혼자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변 친구들보다는 많은 영화를 섭렵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가난한 자취생이기 때문에 학창시절처럼 극장을 자주 가지는 못한다.
 

                                    그래도 전 아이스크림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IT강국 아니던가. 극장을 가지 못하는 울분을 웹하드 서비스의 코인충전에 풀어내면서 그동안 보아오지 못했던, 그리고 아쉽게 놓쳤던, 또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던 많은 영화들을 폭식할 수 있었다. 장르와 감독과 주연을 가리지 않고 폭식하는 습관은 영화를 본 것인지 혹은 보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6년정도 지난 것 같다. 

영화를 쓴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난 영화가 전공도 아니요, 따로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을뿐더러, 영화비평이라는 범주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글발이 좋지 않다. 그저 영화를 본 후 내 생각과 느낌을 주절거리는 단순한 잡문에 불과하다. 컴퓨터는 싸이와 영화와 메신저밖에 모르던 내가, 이러한 나의 잡문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내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다.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두서없는 시작은 각설하고, 지난주 폭식했던 영화들 중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세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러브레터(이와이 순지감독, 1995년작), 무지개 여신(쿠마자와 나오토 감독, 2006년작), 그리고 이프온리(길 정거 감독, 2004년작).

 

죽음에 대한 영화
이 세편의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러브레터는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가 죽은 연인을 잊어가는 과정을 그렸고, 무지개 여신은 사랑인줄 몰랐던 사람의 죽음 후 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프온리는 연인이 죽을 것을 알게 된 남자의 희생을 다룬 영화다. 개인적으로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나에게 한줄기 눈물의 축복을 안겨준 영화들이기에 참 고맙다.

영화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男)  훈남이다.


죽음은 곧 상실, 그리고 그리움과 슬픔
영화에서 주되게 바라보았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소중함이다. 후지이 이츠키(女)는 동명 동급생이었던 후지이 이츠키(男)의 사랑을 그가 죽고 나서 깨닫게 된다.(러브레터) 오누이처럼 붙어다녔던 토모야와 아오이는 아오이의 죽음으로 그 사랑을 알게 된다.(무지개 여신) 사랑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이안은 사만다의 죽음을 예견한 후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녀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이프온리) 그리고 그 죽어간 이들의 진심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가슴이 동하고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고이지 않는가. 

왜 죽는지 궁금하지 않다. 얼만큼 화려하게 파괴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딱 미국이다.
(영화 트랜스포머)

가치없는 죽음, 그것은 관객의 선택적 판단
그러나 가치없는 죽음도 있다. 물론 영화속이다. 주로 헐리웃에서 만들어내는 블록버스터, 혹은 갱스터 영화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혹은 악당)의 총에 뿜어져 나오는 많은 탄환에 머리가 터지며 죽어가는 그들은 그저 죽는 역할의 배우일 뿐이다.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 우리는 그러한 장면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가령 트랜스포머에서 디셉티콘이 멋지게 변신을 하고 주변의 군인을 학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하는가. 왜 죽었는지 보다 어떻게 죽이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영화 무지개 여신의 아오이와 토모야. 이렇게 이쁜 우에노 주리를 몰라보다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
위의 세 편의 영화에서의 죽음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다들 알겠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후지이 이츠키(男)의 죽음은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다. 아오이의 죽음으로 토모야는 그녀의 사랑을 모른척 했던 죄책감과 미안함에 대성통곡을 한다. 사만다가 죽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까지 알고 있던 이안은 스스로 그 시간, 장소에서 그 방법 속으로 들어가 사만다 대신 죽음을 택한다. 죽음이 가치 있게 되는 순간, 그것은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故 김주익 열사. 돌아가신 후 내 삶은 달라졌다.

죽음의 가치?
이경해 열사가 스스로 몸에 칼을 긋고 돌아가셨다. 배달호 열사는 온몸이 불타는 고통속에서 돌아가셨다. 김주익 열사는 밥을 끌어 올리던 동아줄에 목을 감고 돌아가셨다. 더 멀리 가면 전태일 열사도 스스로의 목숨을 민중들에게 받치셨다. 가깝게는 허세욱 열사가 FTA반대를 외치며 산화하셨다. 수많은 열사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 민중들에게 무엇인가 깨닫게 해 주셨다. 그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그나마 이만큼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분들의 생각에 우리는 눈물짓지 않았는가. 가슴이 찢어질 만큼 고통스럽고 슬퍼서 그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살고 있지 않는가.

                            대학생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오늘 오전에 또 한명의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게 강요받던 여대생은 그 사실에 비관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버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생들이 목숨을 버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그들의 죽음은 그저 용기없는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라 치부하기는 너무나 슬프고 아프고 화가 난다.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들이었겠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따로 있다. 난 많은 대학생들의 죽음을 강요한 것은 현재 MB정부와 썩을대로 썩은 보수층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자 대학만을 원하는 이 나라 모든 대학 당국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넌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더 이상 죽지 말자, 아니 죽이지 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다.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은 하루에 6명씩 죽는다. 수많은 농민들은 비료 값이 오르고 쌀값이 떨어지고 값싼 외국 농산물이 들어올 때마다 죽어 나간다. 그리고 우리 대학생들은 매년 오르는 등록금에 죽는다. 경제위기를 연일 부르짖고 있지만 기업의 곶간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서민의 주머니는 비어가는데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그리고 우리들의 몫
이츠키(男)가 죽고 그 흔적을 따라 가는 이츠키(女)는 그가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고 한방울의 눈물을 흘린다. 아오이가 남긴 러브레터를 본 토모야는 대성통곡을 한다. 죽음인지 알면서도 택시에 올라타는 이안의 눈에도 한가득 고여 있는 눈물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여운에 관객들은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삶은 영화와 다르다. 소중한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같이 아파해야 한다. 영화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물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삶은 그 눈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친구들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두지 말자. 안타깝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영화 속 죽은 이들은 남은 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눈물로 남겠지만, 현실 속 우리들의 삶은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투쟁으로 올곧게 세울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세워야 한다.

 

러브 레터
감독 이와이 슌지 (1995 / 일본)
출연 나카야마 미호, 사카이 미키, 카시와바라 다카시, 토요카와 에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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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여신
감독 쿠마자와 나오토 (2006 / 일본)
출연 이치하라 하야토, 우에노 주리, 아오이 유우, 사사키 쿠라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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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 온리
감독 길 정거 (2004 / 영국, 미국)
출연 제니퍼 러브 휴이트, 폴 니콜스, 톰 윌킨슨, 다이아나 하드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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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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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토
감독 멜 깁슨 (2006 / 미국)
출연 루디 영블러드, 달리아 헤르난데즈, 조난단 브리워, 라울 트루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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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문명은 외부의 침입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먼저 붕괴된다" - 윌 듀런트


 영화 시작부터 문제다


우리가 다소 생소한 이야기인 마야문명을 매우 적나라하고 파격적으로, 그리고 긴장감있게 그린 [아포칼립토]는 그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 영화 제작사의 로고가 지나가기 무섭게 논란의 여지를 보여준다. 윌 듀런트의 인용문을 넣지 않았다면 영화는 단순한 액션영화로서의 완성도와 흥행성, 그리고 당시의 문화를 뛰어나게 묘사했다는 부분에서 호평
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윌 듀런트의 일용문 한줄로 이 영화를 선택할수도 있다.
 


문명을 판단하는 왜곡된 기준. 그것은 일반화된 서구의 시선.


각 민족, 혹은 국가, 혹은 문명마다 각자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또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문명을 판단하는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영화 "로빈슨크루소"의 첫장면이 생각이 난다. 무인도에 떨어진 친종교적인 로빈슨은 해변에서 원주민들이 사람을 먹는 장면을 보고 "죄악"이라 생각해 원주민을 죽이다. 그 중 한명의 원주민을 살린 뒤 자신의 노예로 사용한다. 그때 원주민은 "친구가 죽으면 그 시신을 먹어야 친구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간다"라는 특수한 문화를 이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혹은 인간적 관점에서 "식인"의 행위는 말할 필요 없이 죄이지만, 문화적으로 다가간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 원주민들의 관습일 뿐이다. 이것을 나쁘게 보고 그들을 "신"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생각 자체가 문화의 상대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들의 기준을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이었을 시절,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소년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영향을 꽤 커다란 것이다. 우리는 미국(혹은 서구)을 아름다운 나라라고 인식하며 살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이상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서구적인 기준으로 변해왔다. [록키]는 소련 사회주의자를 쳐부수는 정의의 사도였고, "백인만 도와주는" 슈퍼맨은 우리의 영웅이었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유적을 훼손하는 도굴꾼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열광했다. [아포칼립토]는 그러한 시선을 가진 자들이 만든 기만적인 영화다. "신대륙발견"이라는 건방진 생각의 왜곡된 역사를 아직도 부르짖는 그들은 영화속의 마야문명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그리고 비인간적인 "동물"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영화 도입부에 인용문을 삽입,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비겁한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이런 파렴치한 행위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높은 영화적 완성도, 짜증나는 그들의 논리

 

영화는 전반적으로 완성도과 굉장히 높다. 사실적인 고증과 묘사로 그 어떤 영화보다 집중하기 쉽다. 또한 영화 중후반부터의 추격씬은 아마 몇년간 영화인들에게 회자될만한 명장면일 것이다. 언어도 영어가 아닌 마야의 언어(확실하진 않다)를 사용한 것도 과감한 시도이며, 이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보다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영화가 그 사회 혹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뻔뻔한 궤변을 당연하다는 듯이 외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들의 논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화된다. [unite 93]에서의 패트리어티즘, 뻔뻔하게 돌아오고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록키 발보아] [슈퍼맨리턴즈] [인디아나존스4] [다이하드4]. 우리는 이러한 팍스아메리카나를 외치며 돌아오는 복고 영화들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문화적 영역에서의 그들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그리고 뻔히 보이는 미패권주의(혹은 미우월주의)를 지속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알고는 있나....진정한 야만은 너희들이라는 것을...


 이런 뻔뻔하고 창피한 영화들을 계속 만들어간다면, 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멀쩡한 원주민이 있는 대륙을 "신대륙"이라 자처하며 문명을 파괴하고, 인디언을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학살하고, 각 국가의 전쟁을 조장하며 무기를 팔아 부를 축척하고, 노근리에서 우리민족을 학살하고, 베트남, 파나마, 소말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등등등등등 에서 학살을 자행한 너희들이야 말로 진정한 "야만"이다. 


※ 이 글은 2007년 2월 9일 본인의 미니홈피에 포스팅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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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3
감독 샘 레이미 (2007 / 미국)
출연 토비 맥과이어, 커스틴 던스트, 제임스 프랭코, 토퍼 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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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피터파커가 어떻게 변해서 돌아온 것이냐?
 
기존의 영웅과는 다른 스파이더맨!
 
영화는 항상 그랬다. 악당은 있지만 태생이 악한 사람은 없다. 변종거미에 물려 뜻하지 않은 힘을 가지게 된 피터는 자신의 생활고에도 꿋꿋히 악당을 잡으러 다닌다. 물론 그 과정은 힘들다. 좋아하는 여자를 싫다고 해야하고, 학업성적은 떨어지고, 직장을 잃고, 한번 쯤 포기해야 겠단 생각에 포기도 해보지만, 몸속의 정의로움과 거미의 힘은 그를 다시 영웅질의 파도속에 떨구어 놓는다. 가장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영웅. 점점 성장하는 그가 이제 정치적 코드를 살며시 적셔놓은 평범한, 아니, 기만적인 3편으로 되돌아 왔다. 파커가 변한것은 아니겠지.....
 
 
 
▲여전히 굉장한 포스와 스케일을 보여주는 액션장면!
 
악당이 너무 많아!
 
뉴고블린은 초반에 처리하고, 샌드맨도 얼추 정리하는데 베놈이 문제다. 외계에서 온 기생충은 피터에 붙어 그의 능력을 배가시키면서 복제한다. 비행청소년이 된 파커는 시덥잖은 건방을 떨며 스스로의 적을 만들어 내고 결국 베놈이라는 악당을 만들어 낸다. 영화는 2시간이 넘는 런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발버둥을 치면서 다소 산만하게 진행된다. 결국 베놈과 샌드맨, 고블린과 스파이더맨의 태그매치라는 다소 유치하고 저학년스러운 대결구도, 거기다 뉴스로 생중계 된다는 소박한 영웅을 대중적 영웅을 만들어 내기위해 다소 진부한 장치까지 보여준다. (하긴, 영화가 애들보라고 피도 안튀더라...)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건방진 파커의 반성과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책임만은 아니다.
 
▲재수없이 사람죽이고 괴물이 된 샌드맨!
 
이라크전쟁을 반성하고 정의로운 미국으로 돌아와라??
 
어느 리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국가인 미국(영화에서는 성조기를 짜집기한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스파이더맨이다)이 이라크전쟁(혹은 수많이 일으킨 중동전쟁)이라는 실수로 스스로의 정의를 버리고 타락했다.(검은 옷의 스파이더맨을 이야기한다. 옷의 색이 검은 것은 중동의 기름을 탐하는 미국의 메타포라 한다.) 그러니 스스로의 잘못을 어서 수습하고 예전의 정의롭고 강한 미국으로 돌아오라! 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샌드맨은 중동의 모래바람을 형상화한 캐릭터이고 마지막 대결에서 거대해진 샌드맨은 스파이더맨으로서는 (미국) 어찌할 수 없는 상대이니 싸우지말고 화해(혹은 용서)하라 한다. 어찌보면 그럴싸 한 해석이다. 하지만 미국이 강하긴 해도 정의로운 적이 있었던가???
 
▲그래. 이 모습은 부시랑 좀 닮긴 했다.
 
 
기만적인 메세지로 대중을 현혹하지 마라!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화면 가득 펄럭이는 성조기를 볼수 있다. 미우월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미국의로의 귀환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위에서 질문했듯 나는 미국의 정의로운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는 불한당같은 미국(지금도 미국은 전세계에서 5~6개의 전쟁과 내전에 관여하고 있다.)은 전혀 정의롭지 못하다. 영화가 이미지로 보여주는 정치적 메타포는 그럴싸하고 포장되어 있다. 물론 감독이 부시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세지로 단순히 생각하면 되겠지만, 영화의 파급력을 본다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이유는 명료하다.
 

▲베놈(부시)이 목을 죄는 것은 미국(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전세계의 민중이다!
 
 
미국에 대한 반성없이 전쟁(미국이 일으킨)만 반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영화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의 본성이다. 전세계를 미 일방주의(혹은 패권주의)로 좌지우지 하려고 하는 미국의 본성은 근대적 제국주의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욱 간교한 침략을 계획하고 실현한다. 독재를 막고 대량살상무기를 회수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이라크전쟁은 결국 미국의 기름욕심때문에 일어난 침략전쟁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를 통째로 삼키려는 FTA도 미국의 침략수단 중 하나이다. 이러한 미국의 본성을 바로보지 않고 미우월주의를 저변에 깔아놓고 "전쟁을 반성하고 그만두어라!"라는 식의 기만적 반성의 메세지는 오히려 극단적인 우월주의의 표현보다 위험하다. 그들의 논리에 현혹될 위험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다!
 
 영화속의 메세지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정치적 입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이데올로기를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물론 감독 혹은 제작자의 주관적 견해가 반영될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볼 이런 영화(흥행이 잘 될수 밖에 없는)를 바라볼 때, 그들의 논리에 휘말리거나 혹은 기만적 술수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파이더맨3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태도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견지해야 한다.


※이 글은 2007년 6월 4일 본인의 미니홈피에 포스팅한 글을 올린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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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액션배우다
감독 정병길 (2008 / 한국)
출연 권귀덕, 곽진석, 신성일, 전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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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액션배우다](정병길 감독 2008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꿈들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 꿈의 무게는 꼬꼬마 시절 뜬구름과 같다면 세상을 조금씩알아가는 나이가 되고, 또 그 세상에 한발 들여놓게 되는 순간, 뜬구름은 그 크기에 비례하는 질량으로 우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꿈꾸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상이한 삶을 살면서 그 꿈을 다시 뜬구름과 같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아, 그렇게는 안되야 되는데.

꿈을 쫓는 사람들, 그 용기에 박수를..

영화는 제목 그대로 액션배우들의 삶에 대한 다큐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배우가 아니라, 위험한 스턴트를 하는 액션배우들이다. 예상대로 그 배우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촬영은 매우 위험하다. 차를 뒤집어야 하는 스턴트와 배우 대신 맞아야 하는 연기, 우리가 영화에서 "위험하다"라고 느끼는 대부분의 장면을 이들이 대신한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연기는 그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제발로 걸어와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다. 액션스쿨 8기 60여명이 지원하고 36이 합격, 이중  한달만에 16명을 제외하고 다 제발로 나갔다. 그리고 4년이 지나고, 스턴트를 하는 8기들은 단 3명이다. 액션배우를 꿈꾸다 영화 감독이 된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의 경험과 동기들의 삶을 거친 화면속에 담는다.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재밌지만 그 속에 담긴 액션배우들의 삶은 적당하지 않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장면을 이들은 웃으면서 해치운다. 왜일까.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무섭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진 중 선글라스를 낀 배우는 권귀덕. 영화 [괴물]에서 한강으로 뛰어든 배우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카 스턴트의 지존이라고 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무섭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이 일을 시작해서도, 하고 있어도 안되죠." 5년전 차에 치이고 멀쩡하게 일어나는 자신을 보고 스턴트를 꿈꾸게 됐다는 그는, 8기 액션스쿨 학생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다. 영화 [놈놈놈]을 찍다가 당시 무술감독이었던 고 지중현 감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3명중 2명이 일을 그만둔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은 꿈을 버리고 패배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그들을 보여준다. 죽음과 가장 가까웠던 그들, 모두 한번씩은 저승사자와 악수를 하고 돌아온 그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들을 '배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사실에 그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크기. 그들의 이야기. 꿈을 쫓는 자의 아픔. 그리고...

각자의 사연은 다 있다. 영화는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삶을 비추어 주고, 현재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얼마나 꿈에 가까워 지려 노력하고 있는가. 얼핏 보면 생각없어 보이고, 양아치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할짓 없어 몸굴리며 산다고 할 수도 있다. 죽으려고 발버둥 치는 얼치기로 보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춰지는 모습들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상처이고 아픔이다. 꿈을 쫓는 사람들에 대한 멸시, 현 사회의 굴레속에 천대받는 직업. 그리고 그들에 대한 편견. 얼마만큼 열심히 살아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다수의 편견을 영화는 조심스레 경고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모두 액션배우다 라고. 그리고 그 액션배우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당당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자.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삶을 비추는 고마운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 하나다. 영화 속 허구들이 너무 허무맹랑하다면 이러한 좋은 기능을 느끼지 못하겠지만(예를 들어 트렌스포머를 보면서 무엇을 비춰야 하는가?) 우리의 삶과 조금이라도 엇비슷 하다면 이러한 좋은 기능을 100% 발휘한다. [우리는 액션배우다]라는 영화는 이러한 점에서 나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꿈을 쫓아 가는 나의 모습. 어떠하나. 권귀덕 배우가 이야기 했던 "죽음이 무섭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이란 말에서 나도 이런 각오가 되어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곧, 아직 부족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권귀덕이라는 액션배우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미친듯이 좋아서 행복한 사람. 행복하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미친듯이 하는 배우. 그 액션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꿈을 쫓는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그것은 나의, 혹은 우리의 삶에서 희석되어 가는 꿈을 잡으라는 일종의 경고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기본자세이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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