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켄 로치 감독 2006년작)

 

영국?

 

우리가 아는 영국은 어떤 이미지일까. 베컴의 왼발과 해리포터, 신사의 나라, 축구의 종주국 등. 이상하게도 미국보다는 영국이 좀 더 착해보이지 않은가? 물로 20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필두로 전세계 수많은 제 3국을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착취했던 제국주의의 그림자도 보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어떤 이미지인가? 글쎄. 별로 신경이 안가는 나라 아니던가?

 

아일랜드? 잉글랜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영국에게 점령당한 아일랜드 청년들의 저항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테러집단 중 하나로 알고 있는 IRA(아일랜드 공화군)에 뛰어든 의사청년 다미안과 IRA의 지역지도자였던 그의 형 테디에 대한 비극이다. 영화는 평화롭고 잔잔한 아일랜드의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해서 그들이 서로 대립하고 죽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시선은 아일랜드의 청년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켄 로치는 영국인이다. 다시 말해, 영국인이 스스로의 과오를 고백하는 일종의 반성문인 것이다. 그러한 만큼, 그가 바라보는 1920년 아일랜드의 모습은 슬프고 괴롭고, 답답하기만 하다.

 

행복해 지고 싶어?

 

헐링(하키랑 비슷해 보인다)경기를 하던 평화로운 마을에 영국군이 난입한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는 검문을 하더니, 이름을 영어로 말하지 않는다며 어린 청년을 때려죽인다. 그리고는 웃으며 떠나간다. 이런 어이없는 영화의 시작은 아일랜드를 강제점령한 영국의 만행과 아일래드에서 일어나던 야만적인 폭압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런 가감없이. 그리고, 영화는 IRA에 들어가는 다미안이라는 청년의 시선으로 그들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초반부, 행복해 지고 싶어? 라는 질문을 넌지시 던진다. 그리고 일류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고, 런던의 일류 병원에 취직을 한 다미안의 선택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결정이 옳고 그름은 영화에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결정에 넌지시 미소를 띄게되었던 나는, 행복이란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되고 또 이루어야 되는 의식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전쟁영화가 전투 장면이 많지 않다면?

 

괜찮다. 전투장면이 스팩터클하고, 사실적이지 않아도 전쟁영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영국에 저항하는 아일랜드인들의 투쟁을 그린 저항영화다. 간간히 등장하는 전투가 어설프다고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초딩스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들의 논쟁을 곱씹어 보자.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를 생각했다.

 

 

아일랜드의 자치권 획득. 그리고 갈라지는 IRA

 

다미안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IRA의 지역지도자였던 자신의 형 테디이다. 그는 열개의 손톱이 빠지는 고문을 당해도 동지들을 팔지 않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일랜드 민중들을 향한, 그리고 아일랜드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열정이 식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가 영국의 자치령으로 들어가는 조약에 합의하자 테디는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보다 먼저 나오는 장면에서, 아일랜드의 자본가의 재판장면은 이런한 테디의 선택을 예견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치도시에서 벌어지는 이 재판은 자본가가 엄청난 이자를 받지 못해 벌어지는 것인데, 이에 아일랜드 공화국 법정은 그 자본가의 횡토를 단죄하고 벌금형을 구형한다. 많은 IRA의 성원은 그 판결을 받아드리지만, 테디는 그 자본가가 무기를 공급해주는 자금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법정의 구형을 거부하고 나선다. 독립과 자유. 민중을 향한 그들의 투쟁의 원칙이 무너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영국자치령으로 복속된 아일랜드의 자치군에 들어가는 테디는 다미안이 IRA에 남아있는 것을 못내 아쉬워 한다. 그리고 형제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한명은 자치군으로, 그리고 다미안은 아일랜드 민중의 해방을 위한 IRA로.

 

영화의 반복. 영국군과 자치군

 

영화 시작과 동시에 영어를 하지 못해 맞아 죽은 청년의 집에 테디가 가담한 아일랜드 자치군이 들어와 영국군과 똑같은 야만적인 행위를 자행한다. 그들은 IRA를 스스로 막아내지 못하면 다시 영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때 같이 싸웠던 동지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탄압을 시작한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반복하면서 과연 누가 옳았던 것인지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원칙과 타협에 대한 감독의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다미안이 이야기하는, 즉, 민중이 잘사는 완전 독립의 국가. 일부의 자본과 권력에 물든 이들이 맺은 자치령 조약을 거부하고, 아일랜드 민중들의 해방을 주장하는 IRA는 또 다시 힘든 싸움을 준비하려 한다. 이제 아일랜드 공화군(해방군이라 표현해도 좋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라, 아일랜드 자치군이 된다. 다미안이 조약 발표 이후 논쟁에서 우려한 바와 같이, 아일랜드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영국의 계략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원칙과 타협.

 

영화는 테디가 다미안을 사형시키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다미안은 영국군에 잡혀 고문을 다하던 테디가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 처럼, 자치군이 테디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을 선택한 다미안, 죽음의 순간 그의 거친 숨소리과 흔들리는 눈빛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분열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다. 그를 죽이는 테디의 슬픔은, 동족상잔의 아픔으로 인한 슬픔이 아니라, 어리석은 길을 택한 동생에 대한 연민이다. 이 형제의 교차하는 눈물은 형상은 같더라도 그 의미는 상이하다. 원칙과 타협. 분노와 연민. 무엇이 옳은지 영화는 대답하지 않지만 이 쯤되면 테디가 싫어질만 하다. 그리고 다미안과 테디 형제의 비극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서로를 경계하는 동족의 비극. 영화는 끝나도 우리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가 이 형제를 서로 죽이게 하였는가?

 

켄 로치 감독이 영국인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대단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구하는 것은 미국이나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암시당해 왔다. 외계인도 미국에만 온다. 영웅은 다 미국사람. 영화의 힘은 그렇게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성장해 왔다. 우리나라라고 그러지 않는가? [태극기 휘날리며], [쉬리], [태풍] 등의 소위 반공영화의 맥은 간간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세상이 변한 만큼 그들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법은 세련되고 더 감교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영화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보리밭은 흔드는 바람]은 아일랜드 공화군의 분열과 형제의 비극을 보여주며 테디의 선택을 원칙에서 어긋난 개량적이고 타협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깔린 진짜 분열의 이유를 조용히 보여준다. 바로 영국이라는 존재. 영국의 분열정책은 아일랜드의 적대감을 영국에서 동족으로 교묘하게 바꾸어 놓았다. 형제의 비극의 원흉은 사상이나 생각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 근본 바로 영국이라는 강대국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남과 북이 서로를 적이라 하게 된 근본적 원인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일까? 아니, 보다 명확한 질문을 하자. 과연 누구일까?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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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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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픈일이다. 한루 한달 일년 십년 지나가는 세월에 기력은 쇠퇴하고 시간은 빨라진다. 지나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것 처럼 늙어간다는 것도 막거나 정체시키지 못한다. 주변의 변화에 적응이 더뎌지고, 많은 기억과 추억은 그 수명을 다하며 바로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하기 힘들어진다. 늙어간다는 것은 몸이 쇠약해지는 생물학적 슬픔보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더 슬픈일이다.

그것은 기쁜일이다. 생각은 깊어지고 경험은 풍부해지며 사리분별과 상황판단의 근거가 늘어간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가는 기쁨과 내가 창조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 진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벗이 있다면 늙는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기쁨이 배가될수 있다.

워낭소리. 그것은 대화였다.

늙은 농사꾼이 있다.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어 9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몇십년을 반복해 왔던 농사일을 아직도 하고 있다. 하루하루는 반복되고 같은 일이 점차 힘겨워 진다. 매일 몸이 아프고 잘 걷지도 못한다. 아내의 잔소리와 한풀이는 더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매일같이 밭과 논을 갈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남들이 다 뿌리는 농약 한번, 비료한번 뿌리지 않고 그는 묵묵히 농사일을 해 간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30여년 묵묵히 지켜준 친구가 있다. 이름도 없고 말도 못하지만 늙은 농사꾼에게 그만한 친구는 없다. 아무 말 없이 일을 해도 늙은 농사꾼은 소와 소리없는 대화에 힘을 얻는다.

아내의 잔소리, 애정의 표현일 뿐...

아내는 불만이 많다. 소가 죽을까봐 농약을 치지 않아 매일같이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남들 다 주는 비료도 주지 않아 농작물의 수확이 더뎌질 때도 불만이다. 입버릇처럼 "저 소새끼가 죽어야 내가 편할텐데..."라며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소가 너무 늙어 힘이 떨어져 달구지를 끌지 못할 때에는 뒤에서 그 달구지를 밀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은 달구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또다시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반복되는 잔소리는 남편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어느샌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이 섞인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얼마 남지 않는 날에 대한 걱정도 담긴다. 소가 없으면 내년엔 어찌할고...당신 죽으면 나는 농사 못진다...자식 집에서 눈칫밥 먹고 사는니 당신 죽으면 같은 죽을꺼다...잔소리에 담긴 애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도 남편은 묵묵히 소와 함께 논으로 나간다.


너무 늙은 소. 보다 더 늙은 농사꾼

겨울이 다가온다. 늙은 농사꾼은 나무를 하러 늙은 소와 함께 산으로 나간다. 소 달구지에 나무을 한짐 싣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의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지게를 진 농사꾼의 걸음과 닮았다. 맑은 워낭소리가 울리고, 아무 말 없이 걷는 오래된 두명의 벗은 또다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소의 삶의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사꾼. 그러나 그냥 줘도 안가져 간다는 우시장 상인들의 조롱에 "안 팔아!"를 연신 외치는 농사꾼의 고집은 평생을 옆에서 지켜준 소에 대한 마지막 의리였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것들.

조롱섞인 우시장 상인들. 추석에 찾아와 소를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식들. 기력이 다한 소를 대신하기 위해 우시장에서 구입한 젊은 암소. 그리고 망나니 송아지. 영화에서 보여지는 젊은 것들의 모습은 늙어가는 농사꾼과 소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농사꾼과 소는 아무런 불평이나 꾸지람을 하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프기 보다는 아름다워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다시 삶을 이어가는 그들.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죽음을 앞둔 그들이 아니라 늙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젊은 것들이다.


소가 죽었다.

평생을 걸고 있던 고삐를 풀어줬다.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고삐를 풀자, 잠시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조용히 숨을 거둔다. 밭 한켠에 소를 묻었다. 봉분도 쌓았다. 항상 소를 욕하며 잔소리를 하던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늙은 농사꾼은 아무말이 없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마당 한가득 쌓여있는 뗄감을 보며 고마워 한다. 손에 든 워낭은 더이상 울리지 않는다. 옆에 있어야 할 소는 이미 죽었다. 늙어간다는 것의 종착이다. 나무밑에 앉은 늙은 농사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외로워 보인다. 황량한 밭이 농사꾼의 마음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농사꾼은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 그랬듯이 내일도 논과 밭으로 나가 평생 했던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 늙어가는 삶이다. 더 이상 힘들일도, 두려울 것도 없다.
 
소리의 힘.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워낭소리이다. 영화 전반적은 깔려있는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은 그 어떤 영화음악보다 아름다웠다. 개구리소리, 산새소리, 매미소리. 우리가 흘려 들었던 자연의 소리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맑고 투명한 워낭소리. 늙은 소가 농사꾼에게 마음으로 전달하는 소리다. 그 울림은 영화가 끝나고 몇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진다. 늙어간다는 것.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과 같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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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아내 상세보기

 

이야기는 이렇다.

 

둘도 없는 친구. 재문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예준은 그의 절친이자 유망한 펀드매니져다. 지숙은 재문의 아내.

재문과 지숙은 미국이민을 준비하지만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고, 이러한 재문을 예준이 도와준다. 그리고 지숙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예준의 실수로 죽는다. 그 죄를 재문이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게 되고, 그 사이 예준은 그 죄책감에 지숙을 금전적 지원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재문이 출소하고 지숙은 한국으로 돌아와 헤어샾을 열어 성공한다. 예준은 그 사이 회사의 이사진이 되며, 지숙에게 연정을 품고, 재문과 지숙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지숙에게 작업을 건다. 이런 내용이다.

 

내용은 불륜치정드라마. 그러나 그 이면에....

 

위에 썼듯 영화는 중년 성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사랑과 전쟁에 나올 법한 스토리인것 같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단순한 치정드라마를 넘어서는 자본과 인간에 대한 일종의 상황극이다. 그리고 영화는 돈이 가진 힘을 이야기한다. 그 힘은 자신의 절친의 부인을 취할수도 있고, 그 힘에 도취되어 자신을 부정할 수도 있고, 양심을 팔수도 있고, 모든 것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말은 파멸이다. 그 무시무시한 힘은 뒤늦게 깨달은 양심이라는 불길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덫이다.

 

 

영화는 응큼하다.

 

그렇다. 영화는 응큼하다. 남자 둘이 보기에도 민망한 정사 장면도 그렇다. 그러나 그 응큼함 때문에 영화가 응큼해 지지는 않는다. 영화의 응큼함, 아니, 감독의 응큼함은 신경써서 보고 듣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그리고 마치 감독은 '난 불륜 드라마를 찍었는데 왜 그렇게 해석해요?" 라며 되물을 만큼 응큼하다. 그 응큼함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숙이 예준에 대한 마음을 눈치 채고 고민할때 흘러나오는 뉴스의 맨트나, 지숙을 만나고 싶지만 예준이 이간질 하는 사이 고민하고 있는 재문이 보여주는 화면에 나오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현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물질만능주의,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아주 응큼하게 꼬집고 있다. 이 응큼함이 조금 적나라할 정도로 나오는 것은 지숙의 아이를 예준이 죽였다는 것을 알게된 지숙이 재문을 찾아간 장면에서 나온다. 재문은 지숙을 위해, 그리고 예준에게 받은 돈 때문에 아이를 자신이 죽였다 거짓말 하고, 아직 재문을 잊지 못하는 지숙은 그 거짓말은 반박하지 못한다. 지숙에게는 재문보다 예준의 돈과 사회적 위치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괴로워 하는 재문이 술을 마실 때, 재문의 뒤에서 인터넷을 하는 알바생이 보는 동영상은 지난 촛불집회의 영상과 꽃다지의 "반격"이 흘러 나온다.

 

 

그러나 돈은 양심을 이기지 못한다.

 

예준은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영화에 그렇게 나온다. "씨발 대학다닐 때 학생운동했다는 놈이 더불어 사는 사회가 이딴 거냐?" 라는 대사에서 예준은 버럭 화를 낸다. "어짜피 경쟁사회 아닙니까?" 궁핍한 변명이 양심을 감출수는 없다. 감추지 못한 양심은 재문과 지숙의 사이를 갈라놓으면서 재문에게 화를 냈다가 사정을 했다가 울다가 웃는 이 장면에서 그의 정신적 피폐와 돈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 시대 386의 단면을 보여준다. 더욱이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그는 거의 싸이코 패쓰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양심보다는 돈을 택한다. "이 씨발 누구 덕에 다들 살아가는데 지랄이야?" 무심코 던지 그의 말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이 시대의 변질된 양심을 대변한다.

 

그러나, 마지막은 조금 오버다.

 

지숙은 예준을 죽이려 한다. 그를 구해준 것은 재문이다. 그러나 예준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니가 날 속이고 세상을 속인 것 다 니맘인데,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해 져야 하지 않겠어? 니가 그랬으면 좋겠다." 지숙의 대사는 예준의 거짓과 팔아버린 양심의 빈자리의 죄책감을 관통한다. 그리고 결말은 영화속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 자신을 속이고 돈에 양심을 팔아버린 사람이 죽음으로 그 죄를 씻을 각오를 한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돈 따위에 양심을 팔지는 않는다. 돈으로 면죄부를 사지는 않는다. 감독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의 결말은 그저 세상에 타협한, 혹은 돈이라는 물질에 자신의 영혼마저 팔아버린 이 시대 변절자들의 일말의 양심적 선택을 기대하는 환타지일 뿐이다. 관념적이고 끈적거리며 물컹물컹한 덩어리일 수 밖에 없다.혹은, 영화 [오래된 정원]에서 보이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세상으로 돌리는 비겁하고 치졸한 책임전가일 뿐이다.

 

재문과 지숙, 그리고 예준의 관계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끝날줄 알았던 영화는 마지막 재문과 지숙의 재결합과 지숙의 임신 모습을 보여주면 끝난다. 허름한 미용실을 하고 있는 지숙, 그 앞에서 길을 쓸고 있는 재문. 한마디의 대사도 없는 엔딩장면은 예준에게 상처받고,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절대적 권력으로 대변되는 돈에 상처받고 조롱당한 서민의 우울한 일상이다. 이 장면을 우울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던, 돈이 가진 파멸의 힘과 양심을 팔았던 그들, 그리고 살인이라는 극단적 처방을 내린 그들 역시 양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감독 신동일 (2006 / 한국)
출연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 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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