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조금은 생뚱맞을지도 모르는 시작이지만 우선 내가 어떤 과정으로 영화를 접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일단 내 소개를 하자면 연세대학교 원주배움터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며, 조금은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듣는 복학생이다. 특별히 영화를 좋아하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던 중고등학교 시절 주말에 시내 극장을 찾아다니는 것이 내 취미였고, 유일한 소비였다. 친구가 많지 않아 혼자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변 친구들보다는 많은 영화를 섭렵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가난한 자취생이기 때문에 학창시절처럼 극장을 자주 가지는 못한다.
 

                                    그래도 전 아이스크림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IT강국 아니던가. 극장을 가지 못하는 울분을 웹하드 서비스의 코인충전에 풀어내면서 그동안 보아오지 못했던, 그리고 아쉽게 놓쳤던, 또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던 많은 영화들을 폭식할 수 있었다. 장르와 감독과 주연을 가리지 않고 폭식하는 습관은 영화를 본 것인지 혹은 보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6년정도 지난 것 같다. 

영화를 쓴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난 영화가 전공도 아니요, 따로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을뿐더러, 영화비평이라는 범주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글발이 좋지 않다. 그저 영화를 본 후 내 생각과 느낌을 주절거리는 단순한 잡문에 불과하다. 컴퓨터는 싸이와 영화와 메신저밖에 모르던 내가, 이러한 나의 잡문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내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다.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두서없는 시작은 각설하고, 지난주 폭식했던 영화들 중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세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러브레터(이와이 순지감독, 1995년작), 무지개 여신(쿠마자와 나오토 감독, 2006년작), 그리고 이프온리(길 정거 감독, 2004년작).

 

죽음에 대한 영화
이 세편의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러브레터는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가 죽은 연인을 잊어가는 과정을 그렸고, 무지개 여신은 사랑인줄 몰랐던 사람의 죽음 후 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프온리는 연인이 죽을 것을 알게 된 남자의 희생을 다룬 영화다. 개인적으로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나에게 한줄기 눈물의 축복을 안겨준 영화들이기에 참 고맙다.

영화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男)  훈남이다.


죽음은 곧 상실, 그리고 그리움과 슬픔
영화에서 주되게 바라보았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소중함이다. 후지이 이츠키(女)는 동명 동급생이었던 후지이 이츠키(男)의 사랑을 그가 죽고 나서 깨닫게 된다.(러브레터) 오누이처럼 붙어다녔던 토모야와 아오이는 아오이의 죽음으로 그 사랑을 알게 된다.(무지개 여신) 사랑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이안은 사만다의 죽음을 예견한 후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녀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이프온리) 그리고 그 죽어간 이들의 진심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가슴이 동하고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고이지 않는가. 

왜 죽는지 궁금하지 않다. 얼만큼 화려하게 파괴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딱 미국이다.
(영화 트랜스포머)

가치없는 죽음, 그것은 관객의 선택적 판단
그러나 가치없는 죽음도 있다. 물론 영화속이다. 주로 헐리웃에서 만들어내는 블록버스터, 혹은 갱스터 영화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혹은 악당)의 총에 뿜어져 나오는 많은 탄환에 머리가 터지며 죽어가는 그들은 그저 죽는 역할의 배우일 뿐이다.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 우리는 그러한 장면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가령 트랜스포머에서 디셉티콘이 멋지게 변신을 하고 주변의 군인을 학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하는가. 왜 죽었는지 보다 어떻게 죽이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영화 무지개 여신의 아오이와 토모야. 이렇게 이쁜 우에노 주리를 몰라보다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
위의 세 편의 영화에서의 죽음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다들 알겠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후지이 이츠키(男)의 죽음은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다. 아오이의 죽음으로 토모야는 그녀의 사랑을 모른척 했던 죄책감과 미안함에 대성통곡을 한다. 사만다가 죽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까지 알고 있던 이안은 스스로 그 시간, 장소에서 그 방법 속으로 들어가 사만다 대신 죽음을 택한다. 죽음이 가치 있게 되는 순간, 그것은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故 김주익 열사. 돌아가신 후 내 삶은 달라졌다.

죽음의 가치?
이경해 열사가 스스로 몸에 칼을 긋고 돌아가셨다. 배달호 열사는 온몸이 불타는 고통속에서 돌아가셨다. 김주익 열사는 밥을 끌어 올리던 동아줄에 목을 감고 돌아가셨다. 더 멀리 가면 전태일 열사도 스스로의 목숨을 민중들에게 받치셨다. 가깝게는 허세욱 열사가 FTA반대를 외치며 산화하셨다. 수많은 열사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 민중들에게 무엇인가 깨닫게 해 주셨다. 그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그나마 이만큼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분들의 생각에 우리는 눈물짓지 않았는가. 가슴이 찢어질 만큼 고통스럽고 슬퍼서 그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살고 있지 않는가.

                            대학생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오늘 오전에 또 한명의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게 강요받던 여대생은 그 사실에 비관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버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생들이 목숨을 버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그들의 죽음은 그저 용기없는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라 치부하기는 너무나 슬프고 아프고 화가 난다.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들이었겠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따로 있다. 난 많은 대학생들의 죽음을 강요한 것은 현재 MB정부와 썩을대로 썩은 보수층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자 대학만을 원하는 이 나라 모든 대학 당국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넌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더 이상 죽지 말자, 아니 죽이지 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다.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은 하루에 6명씩 죽는다. 수많은 농민들은 비료 값이 오르고 쌀값이 떨어지고 값싼 외국 농산물이 들어올 때마다 죽어 나간다. 그리고 우리 대학생들은 매년 오르는 등록금에 죽는다. 경제위기를 연일 부르짖고 있지만 기업의 곶간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서민의 주머니는 비어가는데 강남의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그리고 우리들의 몫
이츠키(男)가 죽고 그 흔적을 따라 가는 이츠키(女)는 그가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고 한방울의 눈물을 흘린다. 아오이가 남긴 러브레터를 본 토모야는 대성통곡을 한다. 죽음인지 알면서도 택시에 올라타는 이안의 눈에도 한가득 고여 있는 눈물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여운에 관객들은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삶은 영화와 다르다. 소중한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같이 아파해야 한다. 영화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물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삶은 그 눈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친구들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두지 말자. 안타깝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영화 속 죽은 이들은 남은 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눈물로 남겠지만, 현실 속 우리들의 삶은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투쟁으로 올곧게 세울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세워야 한다.

 

러브 레터
감독 이와이 슌지 (1995 / 일본)
출연 나카야마 미호, 사카이 미키, 카시와바라 다카시, 토요카와 에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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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여신
감독 쿠마자와 나오토 (2006 / 일본)
출연 이치하라 하야토, 우에노 주리, 아오이 유우, 사사키 쿠라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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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 온리
감독 길 정거 (2004 / 영국, 미국)
출연 제니퍼 러브 휴이트, 폴 니콜스, 톰 윌킨슨, 다이아나 하드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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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풍산
:

아포칼립토
감독 멜 깁슨 (2006 / 미국)
출연 루디 영블러드, 달리아 헤르난데즈, 조난단 브리워, 라울 트루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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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문명은 외부의 침입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먼저 붕괴된다" - 윌 듀런트


 영화 시작부터 문제다


우리가 다소 생소한 이야기인 마야문명을 매우 적나라하고 파격적으로, 그리고 긴장감있게 그린 [아포칼립토]는 그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 영화 제작사의 로고가 지나가기 무섭게 논란의 여지를 보여준다. 윌 듀런트의 인용문을 넣지 않았다면 영화는 단순한 액션영화로서의 완성도와 흥행성, 그리고 당시의 문화를 뛰어나게 묘사했다는 부분에서 호평
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윌 듀런트의 일용문 한줄로 이 영화를 선택할수도 있다.
 


문명을 판단하는 왜곡된 기준. 그것은 일반화된 서구의 시선.


각 민족, 혹은 국가, 혹은 문명마다 각자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또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문명을 판단하는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영화 "로빈슨크루소"의 첫장면이 생각이 난다. 무인도에 떨어진 친종교적인 로빈슨은 해변에서 원주민들이 사람을 먹는 장면을 보고 "죄악"이라 생각해 원주민을 죽이다. 그 중 한명의 원주민을 살린 뒤 자신의 노예로 사용한다. 그때 원주민은 "친구가 죽으면 그 시신을 먹어야 친구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간다"라는 특수한 문화를 이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혹은 인간적 관점에서 "식인"의 행위는 말할 필요 없이 죄이지만, 문화적으로 다가간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 원주민들의 관습일 뿐이다. 이것을 나쁘게 보고 그들을 "신"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생각 자체가 문화의 상대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들의 기준을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이었을 시절,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소년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영향을 꽤 커다란 것이다. 우리는 미국(혹은 서구)을 아름다운 나라라고 인식하며 살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이상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서구적인 기준으로 변해왔다. [록키]는 소련 사회주의자를 쳐부수는 정의의 사도였고, "백인만 도와주는" 슈퍼맨은 우리의 영웅이었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유적을 훼손하는 도굴꾼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열광했다. [아포칼립토]는 그러한 시선을 가진 자들이 만든 기만적인 영화다. "신대륙발견"이라는 건방진 생각의 왜곡된 역사를 아직도 부르짖는 그들은 영화속의 마야문명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그리고 비인간적인 "동물"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영화 도입부에 인용문을 삽입,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비겁한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이런 파렴치한 행위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높은 영화적 완성도, 짜증나는 그들의 논리

 

영화는 전반적으로 완성도과 굉장히 높다. 사실적인 고증과 묘사로 그 어떤 영화보다 집중하기 쉽다. 또한 영화 중후반부터의 추격씬은 아마 몇년간 영화인들에게 회자될만한 명장면일 것이다. 언어도 영어가 아닌 마야의 언어(확실하진 않다)를 사용한 것도 과감한 시도이며, 이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보다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영화가 그 사회 혹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뻔뻔한 궤변을 당연하다는 듯이 외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들의 논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화된다. [unite 93]에서의 패트리어티즘, 뻔뻔하게 돌아오고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록키 발보아] [슈퍼맨리턴즈] [인디아나존스4] [다이하드4]. 우리는 이러한 팍스아메리카나를 외치며 돌아오는 복고 영화들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문화적 영역에서의 그들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그리고 뻔히 보이는 미패권주의(혹은 미우월주의)를 지속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알고는 있나....진정한 야만은 너희들이라는 것을...


 이런 뻔뻔하고 창피한 영화들을 계속 만들어간다면, 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멀쩡한 원주민이 있는 대륙을 "신대륙"이라 자처하며 문명을 파괴하고, 인디언을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학살하고, 각 국가의 전쟁을 조장하며 무기를 팔아 부를 축척하고, 노근리에서 우리민족을 학살하고, 베트남, 파나마, 소말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등등등등등 에서 학살을 자행한 너희들이야 말로 진정한 "야만"이다. 


※ 이 글은 2007년 2월 9일 본인의 미니홈피에 포스팅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Posted by 지풍산
:
 
스파이더맨 3
감독 샘 레이미 (2007 / 미국)
출연 토비 맥과이어, 커스틴 던스트, 제임스 프랭코, 토퍼 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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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피터파커가 어떻게 변해서 돌아온 것이냐?
 
기존의 영웅과는 다른 스파이더맨!
 
영화는 항상 그랬다. 악당은 있지만 태생이 악한 사람은 없다. 변종거미에 물려 뜻하지 않은 힘을 가지게 된 피터는 자신의 생활고에도 꿋꿋히 악당을 잡으러 다닌다. 물론 그 과정은 힘들다. 좋아하는 여자를 싫다고 해야하고, 학업성적은 떨어지고, 직장을 잃고, 한번 쯤 포기해야 겠단 생각에 포기도 해보지만, 몸속의 정의로움과 거미의 힘은 그를 다시 영웅질의 파도속에 떨구어 놓는다. 가장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영웅. 점점 성장하는 그가 이제 정치적 코드를 살며시 적셔놓은 평범한, 아니, 기만적인 3편으로 되돌아 왔다. 파커가 변한것은 아니겠지.....
 
 
 
▲여전히 굉장한 포스와 스케일을 보여주는 액션장면!
 
악당이 너무 많아!
 
뉴고블린은 초반에 처리하고, 샌드맨도 얼추 정리하는데 베놈이 문제다. 외계에서 온 기생충은 피터에 붙어 그의 능력을 배가시키면서 복제한다. 비행청소년이 된 파커는 시덥잖은 건방을 떨며 스스로의 적을 만들어 내고 결국 베놈이라는 악당을 만들어 낸다. 영화는 2시간이 넘는 런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발버둥을 치면서 다소 산만하게 진행된다. 결국 베놈과 샌드맨, 고블린과 스파이더맨의 태그매치라는 다소 유치하고 저학년스러운 대결구도, 거기다 뉴스로 생중계 된다는 소박한 영웅을 대중적 영웅을 만들어 내기위해 다소 진부한 장치까지 보여준다. (하긴, 영화가 애들보라고 피도 안튀더라...)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건방진 파커의 반성과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책임만은 아니다.
 
▲재수없이 사람죽이고 괴물이 된 샌드맨!
 
이라크전쟁을 반성하고 정의로운 미국으로 돌아와라??
 
어느 리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국가인 미국(영화에서는 성조기를 짜집기한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스파이더맨이다)이 이라크전쟁(혹은 수많이 일으킨 중동전쟁)이라는 실수로 스스로의 정의를 버리고 타락했다.(검은 옷의 스파이더맨을 이야기한다. 옷의 색이 검은 것은 중동의 기름을 탐하는 미국의 메타포라 한다.) 그러니 스스로의 잘못을 어서 수습하고 예전의 정의롭고 강한 미국으로 돌아오라! 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샌드맨은 중동의 모래바람을 형상화한 캐릭터이고 마지막 대결에서 거대해진 샌드맨은 스파이더맨으로서는 (미국) 어찌할 수 없는 상대이니 싸우지말고 화해(혹은 용서)하라 한다. 어찌보면 그럴싸 한 해석이다. 하지만 미국이 강하긴 해도 정의로운 적이 있었던가???
 
▲그래. 이 모습은 부시랑 좀 닮긴 했다.
 
 
기만적인 메세지로 대중을 현혹하지 마라!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화면 가득 펄럭이는 성조기를 볼수 있다. 미우월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미국의로의 귀환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위에서 질문했듯 나는 미국의 정의로운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는 불한당같은 미국(지금도 미국은 전세계에서 5~6개의 전쟁과 내전에 관여하고 있다.)은 전혀 정의롭지 못하다. 영화가 이미지로 보여주는 정치적 메타포는 그럴싸하고 포장되어 있다. 물론 감독이 부시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세지로 단순히 생각하면 되겠지만, 영화의 파급력을 본다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이유는 명료하다.
 

▲베놈(부시)이 목을 죄는 것은 미국(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전세계의 민중이다!
 
 
미국에 대한 반성없이 전쟁(미국이 일으킨)만 반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영화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의 본성이다. 전세계를 미 일방주의(혹은 패권주의)로 좌지우지 하려고 하는 미국의 본성은 근대적 제국주의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욱 간교한 침략을 계획하고 실현한다. 독재를 막고 대량살상무기를 회수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이라크전쟁은 결국 미국의 기름욕심때문에 일어난 침략전쟁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를 통째로 삼키려는 FTA도 미국의 침략수단 중 하나이다. 이러한 미국의 본성을 바로보지 않고 미우월주의를 저변에 깔아놓고 "전쟁을 반성하고 그만두어라!"라는 식의 기만적 반성의 메세지는 오히려 극단적인 우월주의의 표현보다 위험하다. 그들의 논리에 현혹될 위험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다!
 
 영화속의 메세지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정치적 입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이데올로기를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물론 감독 혹은 제작자의 주관적 견해가 반영될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볼 이런 영화(흥행이 잘 될수 밖에 없는)를 바라볼 때, 그들의 논리에 휘말리거나 혹은 기만적 술수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파이더맨3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태도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견지해야 한다.


※이 글은 2007년 6월 4일 본인의 미니홈피에 포스팅한 글을 올린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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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액션배우다
감독 정병길 (2008 / 한국)
출연 권귀덕, 곽진석, 신성일, 전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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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액션배우다](정병길 감독 2008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꿈들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 꿈의 무게는 꼬꼬마 시절 뜬구름과 같다면 세상을 조금씩알아가는 나이가 되고, 또 그 세상에 한발 들여놓게 되는 순간, 뜬구름은 그 크기에 비례하는 질량으로 우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꿈꾸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상이한 삶을 살면서 그 꿈을 다시 뜬구름과 같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아, 그렇게는 안되야 되는데.

꿈을 쫓는 사람들, 그 용기에 박수를..

영화는 제목 그대로 액션배우들의 삶에 대한 다큐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배우가 아니라, 위험한 스턴트를 하는 액션배우들이다. 예상대로 그 배우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촬영은 매우 위험하다. 차를 뒤집어야 하는 스턴트와 배우 대신 맞아야 하는 연기, 우리가 영화에서 "위험하다"라고 느끼는 대부분의 장면을 이들이 대신한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연기는 그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제발로 걸어와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다. 액션스쿨 8기 60여명이 지원하고 36이 합격, 이중  한달만에 16명을 제외하고 다 제발로 나갔다. 그리고 4년이 지나고, 스턴트를 하는 8기들은 단 3명이다. 액션배우를 꿈꾸다 영화 감독이 된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의 경험과 동기들의 삶을 거친 화면속에 담는다.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재밌지만 그 속에 담긴 액션배우들의 삶은 적당하지 않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장면을 이들은 웃으면서 해치운다. 왜일까.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무섭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진 중 선글라스를 낀 배우는 권귀덕. 영화 [괴물]에서 한강으로 뛰어든 배우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카 스턴트의 지존이라고 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무섭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이 일을 시작해서도, 하고 있어도 안되죠." 5년전 차에 치이고 멀쩡하게 일어나는 자신을 보고 스턴트를 꿈꾸게 됐다는 그는, 8기 액션스쿨 학생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다. 영화 [놈놈놈]을 찍다가 당시 무술감독이었던 고 지중현 감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3명중 2명이 일을 그만둔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은 꿈을 버리고 패배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그들을 보여준다. 죽음과 가장 가까웠던 그들, 모두 한번씩은 저승사자와 악수를 하고 돌아온 그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들을 '배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사실에 그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크기. 그들의 이야기. 꿈을 쫓는 자의 아픔. 그리고...

각자의 사연은 다 있다. 영화는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삶을 비추어 주고, 현재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얼마나 꿈에 가까워 지려 노력하고 있는가. 얼핏 보면 생각없어 보이고, 양아치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할짓 없어 몸굴리며 산다고 할 수도 있다. 죽으려고 발버둥 치는 얼치기로 보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춰지는 모습들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상처이고 아픔이다. 꿈을 쫓는 사람들에 대한 멸시, 현 사회의 굴레속에 천대받는 직업. 그리고 그들에 대한 편견. 얼마만큼 열심히 살아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다수의 편견을 영화는 조심스레 경고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모두 액션배우다 라고. 그리고 그 액션배우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당당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자.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삶을 비추는 고마운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 하나다. 영화 속 허구들이 너무 허무맹랑하다면 이러한 좋은 기능을 느끼지 못하겠지만(예를 들어 트렌스포머를 보면서 무엇을 비춰야 하는가?) 우리의 삶과 조금이라도 엇비슷 하다면 이러한 좋은 기능을 100% 발휘한다. [우리는 액션배우다]라는 영화는 이러한 점에서 나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꿈을 쫓아 가는 나의 모습. 어떠하나. 권귀덕 배우가 이야기 했던 "죽음이 무섭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이란 말에서 나도 이런 각오가 되어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곧, 아직 부족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권귀덕이라는 액션배우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미친듯이 좋아서 행복한 사람. 행복하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미친듯이 하는 배우. 그 액션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꿈을 쫓는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그것은 나의, 혹은 우리의 삶에서 희석되어 가는 꿈을 잡으라는 일종의 경고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기본자세이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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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켄 로치 감독 2006년작)

 

영국?

 

우리가 아는 영국은 어떤 이미지일까. 베컴의 왼발과 해리포터, 신사의 나라, 축구의 종주국 등. 이상하게도 미국보다는 영국이 좀 더 착해보이지 않은가? 물로 20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필두로 전세계 수많은 제 3국을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착취했던 제국주의의 그림자도 보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어떤 이미지인가? 글쎄. 별로 신경이 안가는 나라 아니던가?

 

아일랜드? 잉글랜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영국에게 점령당한 아일랜드 청년들의 저항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테러집단 중 하나로 알고 있는 IRA(아일랜드 공화군)에 뛰어든 의사청년 다미안과 IRA의 지역지도자였던 그의 형 테디에 대한 비극이다. 영화는 평화롭고 잔잔한 아일랜드의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해서 그들이 서로 대립하고 죽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시선은 아일랜드의 청년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켄 로치는 영국인이다. 다시 말해, 영국인이 스스로의 과오를 고백하는 일종의 반성문인 것이다. 그러한 만큼, 그가 바라보는 1920년 아일랜드의 모습은 슬프고 괴롭고, 답답하기만 하다.

 

행복해 지고 싶어?

 

헐링(하키랑 비슷해 보인다)경기를 하던 평화로운 마을에 영국군이 난입한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는 검문을 하더니, 이름을 영어로 말하지 않는다며 어린 청년을 때려죽인다. 그리고는 웃으며 떠나간다. 이런 어이없는 영화의 시작은 아일랜드를 강제점령한 영국의 만행과 아일래드에서 일어나던 야만적인 폭압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런 가감없이. 그리고, 영화는 IRA에 들어가는 다미안이라는 청년의 시선으로 그들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초반부, 행복해 지고 싶어? 라는 질문을 넌지시 던진다. 그리고 일류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고, 런던의 일류 병원에 취직을 한 다미안의 선택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결정이 옳고 그름은 영화에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결정에 넌지시 미소를 띄게되었던 나는, 행복이란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되고 또 이루어야 되는 의식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전쟁영화가 전투 장면이 많지 않다면?

 

괜찮다. 전투장면이 스팩터클하고, 사실적이지 않아도 전쟁영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영국에 저항하는 아일랜드인들의 투쟁을 그린 저항영화다. 간간히 등장하는 전투가 어설프다고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초딩스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들의 논쟁을 곱씹어 보자.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를 생각했다.

 

 

아일랜드의 자치권 획득. 그리고 갈라지는 IRA

 

다미안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IRA의 지역지도자였던 자신의 형 테디이다. 그는 열개의 손톱이 빠지는 고문을 당해도 동지들을 팔지 않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일랜드 민중들을 향한, 그리고 아일랜드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열정이 식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가 영국의 자치령으로 들어가는 조약에 합의하자 테디는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보다 먼저 나오는 장면에서, 아일랜드의 자본가의 재판장면은 이런한 테디의 선택을 예견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치도시에서 벌어지는 이 재판은 자본가가 엄청난 이자를 받지 못해 벌어지는 것인데, 이에 아일랜드 공화국 법정은 그 자본가의 횡토를 단죄하고 벌금형을 구형한다. 많은 IRA의 성원은 그 판결을 받아드리지만, 테디는 그 자본가가 무기를 공급해주는 자금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법정의 구형을 거부하고 나선다. 독립과 자유. 민중을 향한 그들의 투쟁의 원칙이 무너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영국자치령으로 복속된 아일랜드의 자치군에 들어가는 테디는 다미안이 IRA에 남아있는 것을 못내 아쉬워 한다. 그리고 형제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한명은 자치군으로, 그리고 다미안은 아일랜드 민중의 해방을 위한 IRA로.

 

영화의 반복. 영국군과 자치군

 

영화 시작과 동시에 영어를 하지 못해 맞아 죽은 청년의 집에 테디가 가담한 아일랜드 자치군이 들어와 영국군과 똑같은 야만적인 행위를 자행한다. 그들은 IRA를 스스로 막아내지 못하면 다시 영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때 같이 싸웠던 동지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탄압을 시작한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반복하면서 과연 누가 옳았던 것인지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원칙과 타협에 대한 감독의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다미안이 이야기하는, 즉, 민중이 잘사는 완전 독립의 국가. 일부의 자본과 권력에 물든 이들이 맺은 자치령 조약을 거부하고, 아일랜드 민중들의 해방을 주장하는 IRA는 또 다시 힘든 싸움을 준비하려 한다. 이제 아일랜드 공화군(해방군이라 표현해도 좋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라, 아일랜드 자치군이 된다. 다미안이 조약 발표 이후 논쟁에서 우려한 바와 같이, 아일랜드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영국의 계략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원칙과 타협.

 

영화는 테디가 다미안을 사형시키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다미안은 영국군에 잡혀 고문을 다하던 테디가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 처럼, 자치군이 테디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을 선택한 다미안, 죽음의 순간 그의 거친 숨소리과 흔들리는 눈빛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분열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다. 그를 죽이는 테디의 슬픔은, 동족상잔의 아픔으로 인한 슬픔이 아니라, 어리석은 길을 택한 동생에 대한 연민이다. 이 형제의 교차하는 눈물은 형상은 같더라도 그 의미는 상이하다. 원칙과 타협. 분노와 연민. 무엇이 옳은지 영화는 대답하지 않지만 이 쯤되면 테디가 싫어질만 하다. 그리고 다미안과 테디 형제의 비극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서로를 경계하는 동족의 비극. 영화는 끝나도 우리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가 이 형제를 서로 죽이게 하였는가?

 

켄 로치 감독이 영국인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대단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구하는 것은 미국이나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암시당해 왔다. 외계인도 미국에만 온다. 영웅은 다 미국사람. 영화의 힘은 그렇게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성장해 왔다. 우리나라라고 그러지 않는가? [태극기 휘날리며], [쉬리], [태풍] 등의 소위 반공영화의 맥은 간간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세상이 변한 만큼 그들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법은 세련되고 더 감교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영화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보리밭은 흔드는 바람]은 아일랜드 공화군의 분열과 형제의 비극을 보여주며 테디의 선택을 원칙에서 어긋난 개량적이고 타협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깔린 진짜 분열의 이유를 조용히 보여준다. 바로 영국이라는 존재. 영국의 분열정책은 아일랜드의 적대감을 영국에서 동족으로 교묘하게 바꾸어 놓았다. 형제의 비극의 원흉은 사상이나 생각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 근본 바로 영국이라는 강대국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남과 북이 서로를 적이라 하게 된 근본적 원인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일까? 아니, 보다 명확한 질문을 하자. 과연 누구일까?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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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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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픈일이다. 한루 한달 일년 십년 지나가는 세월에 기력은 쇠퇴하고 시간은 빨라진다. 지나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것 처럼 늙어간다는 것도 막거나 정체시키지 못한다. 주변의 변화에 적응이 더뎌지고, 많은 기억과 추억은 그 수명을 다하며 바로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하기 힘들어진다. 늙어간다는 것은 몸이 쇠약해지는 생물학적 슬픔보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더 슬픈일이다.

그것은 기쁜일이다. 생각은 깊어지고 경험은 풍부해지며 사리분별과 상황판단의 근거가 늘어간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가는 기쁨과 내가 창조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 진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벗이 있다면 늙는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기쁨이 배가될수 있다.

워낭소리. 그것은 대화였다.

늙은 농사꾼이 있다.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어 9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몇십년을 반복해 왔던 농사일을 아직도 하고 있다. 하루하루는 반복되고 같은 일이 점차 힘겨워 진다. 매일 몸이 아프고 잘 걷지도 못한다. 아내의 잔소리와 한풀이는 더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매일같이 밭과 논을 갈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남들이 다 뿌리는 농약 한번, 비료한번 뿌리지 않고 그는 묵묵히 농사일을 해 간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30여년 묵묵히 지켜준 친구가 있다. 이름도 없고 말도 못하지만 늙은 농사꾼에게 그만한 친구는 없다. 아무 말 없이 일을 해도 늙은 농사꾼은 소와 소리없는 대화에 힘을 얻는다.

아내의 잔소리, 애정의 표현일 뿐...

아내는 불만이 많다. 소가 죽을까봐 농약을 치지 않아 매일같이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남들 다 주는 비료도 주지 않아 농작물의 수확이 더뎌질 때도 불만이다. 입버릇처럼 "저 소새끼가 죽어야 내가 편할텐데..."라며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소가 너무 늙어 힘이 떨어져 달구지를 끌지 못할 때에는 뒤에서 그 달구지를 밀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은 달구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또다시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반복되는 잔소리는 남편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어느샌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이 섞인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얼마 남지 않는 날에 대한 걱정도 담긴다. 소가 없으면 내년엔 어찌할고...당신 죽으면 나는 농사 못진다...자식 집에서 눈칫밥 먹고 사는니 당신 죽으면 같은 죽을꺼다...잔소리에 담긴 애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도 남편은 묵묵히 소와 함께 논으로 나간다.


너무 늙은 소. 보다 더 늙은 농사꾼

겨울이 다가온다. 늙은 농사꾼은 나무를 하러 늙은 소와 함께 산으로 나간다. 소 달구지에 나무을 한짐 싣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의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지게를 진 농사꾼의 걸음과 닮았다. 맑은 워낭소리가 울리고, 아무 말 없이 걷는 오래된 두명의 벗은 또다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소의 삶의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사꾼. 그러나 그냥 줘도 안가져 간다는 우시장 상인들의 조롱에 "안 팔아!"를 연신 외치는 농사꾼의 고집은 평생을 옆에서 지켜준 소에 대한 마지막 의리였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것들.

조롱섞인 우시장 상인들. 추석에 찾아와 소를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식들. 기력이 다한 소를 대신하기 위해 우시장에서 구입한 젊은 암소. 그리고 망나니 송아지. 영화에서 보여지는 젊은 것들의 모습은 늙어가는 농사꾼과 소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농사꾼과 소는 아무런 불평이나 꾸지람을 하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슬프기 보다는 아름다워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다시 삶을 이어가는 그들.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죽음을 앞둔 그들이 아니라 늙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젊은 것들이다.


소가 죽었다.

평생을 걸고 있던 고삐를 풀어줬다.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고삐를 풀자, 잠시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조용히 숨을 거둔다. 밭 한켠에 소를 묻었다. 봉분도 쌓았다. 항상 소를 욕하며 잔소리를 하던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늙은 농사꾼은 아무말이 없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마당 한가득 쌓여있는 뗄감을 보며 고마워 한다. 손에 든 워낭은 더이상 울리지 않는다. 옆에 있어야 할 소는 이미 죽었다. 늙어간다는 것의 종착이다. 나무밑에 앉은 늙은 농사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외로워 보인다. 황량한 밭이 농사꾼의 마음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농사꾼은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 그랬듯이 내일도 논과 밭으로 나가 평생 했던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 늙어가는 삶이다. 더 이상 힘들일도, 두려울 것도 없다.
 
소리의 힘.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워낭소리이다. 영화 전반적은 깔려있는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은 그 어떤 영화음악보다 아름다웠다. 개구리소리, 산새소리, 매미소리. 우리가 흘려 들었던 자연의 소리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맑고 투명한 워낭소리. 늙은 소가 농사꾼에게 마음으로 전달하는 소리다. 그 울림은 영화가 끝나고 몇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진다. 늙어간다는 것. 맑고 투명한 워낭의 울림과 같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Posted by 지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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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아내 상세보기

 

이야기는 이렇다.

 

둘도 없는 친구. 재문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예준은 그의 절친이자 유망한 펀드매니져다. 지숙은 재문의 아내.

재문과 지숙은 미국이민을 준비하지만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고, 이러한 재문을 예준이 도와준다. 그리고 지숙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예준의 실수로 죽는다. 그 죄를 재문이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게 되고, 그 사이 예준은 그 죄책감에 지숙을 금전적 지원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재문이 출소하고 지숙은 한국으로 돌아와 헤어샾을 열어 성공한다. 예준은 그 사이 회사의 이사진이 되며, 지숙에게 연정을 품고, 재문과 지숙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지숙에게 작업을 건다. 이런 내용이다.

 

내용은 불륜치정드라마. 그러나 그 이면에....

 

위에 썼듯 영화는 중년 성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사랑과 전쟁에 나올 법한 스토리인것 같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단순한 치정드라마를 넘어서는 자본과 인간에 대한 일종의 상황극이다. 그리고 영화는 돈이 가진 힘을 이야기한다. 그 힘은 자신의 절친의 부인을 취할수도 있고, 그 힘에 도취되어 자신을 부정할 수도 있고, 양심을 팔수도 있고, 모든 것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말은 파멸이다. 그 무시무시한 힘은 뒤늦게 깨달은 양심이라는 불길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덫이다.

 

 

영화는 응큼하다.

 

그렇다. 영화는 응큼하다. 남자 둘이 보기에도 민망한 정사 장면도 그렇다. 그러나 그 응큼함 때문에 영화가 응큼해 지지는 않는다. 영화의 응큼함, 아니, 감독의 응큼함은 신경써서 보고 듣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그리고 마치 감독은 '난 불륜 드라마를 찍었는데 왜 그렇게 해석해요?" 라며 되물을 만큼 응큼하다. 그 응큼함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숙이 예준에 대한 마음을 눈치 채고 고민할때 흘러나오는 뉴스의 맨트나, 지숙을 만나고 싶지만 예준이 이간질 하는 사이 고민하고 있는 재문이 보여주는 화면에 나오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현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물질만능주의,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아주 응큼하게 꼬집고 있다. 이 응큼함이 조금 적나라할 정도로 나오는 것은 지숙의 아이를 예준이 죽였다는 것을 알게된 지숙이 재문을 찾아간 장면에서 나온다. 재문은 지숙을 위해, 그리고 예준에게 받은 돈 때문에 아이를 자신이 죽였다 거짓말 하고, 아직 재문을 잊지 못하는 지숙은 그 거짓말은 반박하지 못한다. 지숙에게는 재문보다 예준의 돈과 사회적 위치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괴로워 하는 재문이 술을 마실 때, 재문의 뒤에서 인터넷을 하는 알바생이 보는 동영상은 지난 촛불집회의 영상과 꽃다지의 "반격"이 흘러 나온다.

 

 

그러나 돈은 양심을 이기지 못한다.

 

예준은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영화에 그렇게 나온다. "씨발 대학다닐 때 학생운동했다는 놈이 더불어 사는 사회가 이딴 거냐?" 라는 대사에서 예준은 버럭 화를 낸다. "어짜피 경쟁사회 아닙니까?" 궁핍한 변명이 양심을 감출수는 없다. 감추지 못한 양심은 재문과 지숙의 사이를 갈라놓으면서 재문에게 화를 냈다가 사정을 했다가 울다가 웃는 이 장면에서 그의 정신적 피폐와 돈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 시대 386의 단면을 보여준다. 더욱이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그는 거의 싸이코 패쓰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양심보다는 돈을 택한다. "이 씨발 누구 덕에 다들 살아가는데 지랄이야?" 무심코 던지 그의 말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이 시대의 변질된 양심을 대변한다.

 

그러나, 마지막은 조금 오버다.

 

지숙은 예준을 죽이려 한다. 그를 구해준 것은 재문이다. 그러나 예준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니가 날 속이고 세상을 속인 것 다 니맘인데,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해 져야 하지 않겠어? 니가 그랬으면 좋겠다." 지숙의 대사는 예준의 거짓과 팔아버린 양심의 빈자리의 죄책감을 관통한다. 그리고 결말은 영화속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 자신을 속이고 돈에 양심을 팔아버린 사람이 죽음으로 그 죄를 씻을 각오를 한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돈 따위에 양심을 팔지는 않는다. 돈으로 면죄부를 사지는 않는다. 감독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의 결말은 그저 세상에 타협한, 혹은 돈이라는 물질에 자신의 영혼마저 팔아버린 이 시대 변절자들의 일말의 양심적 선택을 기대하는 환타지일 뿐이다. 관념적이고 끈적거리며 물컹물컹한 덩어리일 수 밖에 없다.혹은, 영화 [오래된 정원]에서 보이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세상으로 돌리는 비겁하고 치졸한 책임전가일 뿐이다.

 

재문과 지숙, 그리고 예준의 관계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끝날줄 알았던 영화는 마지막 재문과 지숙의 재결합과 지숙의 임신 모습을 보여주면 끝난다. 허름한 미용실을 하고 있는 지숙, 그 앞에서 길을 쓸고 있는 재문. 한마디의 대사도 없는 엔딩장면은 예준에게 상처받고,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절대적 권력으로 대변되는 돈에 상처받고 조롱당한 서민의 우울한 일상이다. 이 장면을 우울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던, 돈이 가진 파멸의 힘과 양심을 팔았던 그들, 그리고 살인이라는 극단적 처방을 내린 그들 역시 양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감독 신동일 (2006 / 한국)
출연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 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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