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저작권법이 시행된 뒤 처음쓰는 글이라, 사진을 아무거나 가져 오면 잡혀간다는 두려움에 미리 밝힌다. 이 글에 사용되는 사진은 미디어다음에 올라온 사진을 이용한다. 그리고 미디어 다음에 출판한다.
다음은 daum.net 의 서비스 약관 중 13조이다.

제13조(저작권의 귀속 및 이용제한)
① "Daum"이 작성한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기타 지적재산권은 "Daum"에 귀속합니다.
② 이용자는 "Daum"을 이용함으로써 얻은 정보를 "Daum"의 사전승낙 없이 복제, 전송, 출판, 배포, 방송 기타 방법에 의하여 영리목적으로 이용하거나 제3자에게 이용하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본인은 영리목적이나 제 3자에게 이용하게 하지 않기에, 출처를 밝히고 사진을 올린다. 문제가 된다면 바로 삭제를 할 것이며, 본인이 모르는 저작권 관련 내용을 혹 위반하였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


아 조카신발. 머 같구나 대한민국.



각설.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우리나라 최초의 재난영화라 시끄럽던 [해운대 (윤제균감독 2009년작품)]가 벌써 800만 관객돌파라는 성과를 올리며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관람을 한 것은 개봉 후 어느정도의 관객평이 인터넷에 올라올 무렵. 정말로 알바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은 극단적으로 갈리더라. 몇편의 리뷰를 보고는 객관적인 판단력을 흐릴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이후 [해운대]에 대한 모든 기사와 리뷰를 끊고 영화를 보는 날까지 개대도, 걱정도 접어두기로 결정했다.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스펙터클보다 드라마에 집중

그러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감독의 선언이 틀리지 않았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사연과 사랑과 갈등을 그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박중훈의 "메가쓰나미"걱정 장면이 없다면 주말드라마, 혹은 여름특집단막극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쓰나미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기제일 뿐, 그 자체가 주된 것은 아니다. 많이 비교되는 [투머로우(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2004년작품)]에서 지구 온난화로 인한 빙하기가 다가오는 장면이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과는 상이하다. [해운대]는 스케일과 스펙터클에서 [투머로우]에게 밀리지만, 그것을 버린 대신 우리네 이웃의 이야기로 꽉 채운다. 그리고 감독이 이러한 선택은 적중했다.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여기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쉬리(강제규 감독 1999년작품)]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는 그 양과 질이 모두 성장하였다. 감히 상상도 못했던 스케일과 CG로 한국영화의 절정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는 CG의 양으로 승부했던 많은 영화들의 참패로 얼룩지기도 하였다. 최초의 어드벤처 무비를 표방했던 [아유레디(윤상호 감독 2002년작품)]의 대참패와 본격 SF영화 [내츄럴 시티(민병철 감독 2003년 작품)]의 실패.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장선우 감독 2002년 작품)], [예스터데이(정윤수 감독 2002년작품)], [2009 로스트메모리즈(이시명 감독 2002년 작품)] 등의 스타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던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왔다는 걱정마저 나돌게 되었다. 보다 새롭고 참신한 시각적 효과는 이미 헐리웃의 영화들로 인해 관객의 눈이 높아진 것도 있겠지만, 보다 정확한 참패의 이유는 이야기의 부족이었다. 즉, 영화의 내러티브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드라마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산만하게 배치된 CG가 그 원인이었다.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한국에서 장르영화는 뜨지 못하는가.

기존의 공식, 관습, 도상적인 틀에서 그 이야기만 조금씩 바꾸는 헐리웃의 장르영화는 꾸준히 재생산된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본 듯한 장면들로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신나게 영화들을 포식한다. 그러나 유독, 헐리웃의 장르적 특성을 되새김질한 한국영화들은 커다란 흥행을 하지 못한다. 특히 제작비용과 시간투자가 비대한 블록버스터의 경우는 열에 아홉은 그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싸이렌, 단적비연수, 화산고, 천사몽, 퇴마록, 튜브, 원더풀데이즈, 청풍명월, 역도산, 청연, 황진이, 태풍, 형사, 중천.
연도별로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제작비 대비 흥행실패작 들이다. 혹자는 제목조차 모를 수도 있는 영화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당시(제작년도)에 평균 제작비의 두배 이상의 돈을 쏟아부은 블록버스터였다. 하지만 관객들은 비주얼의 완성도보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한국에서 먹히는 영화  소재.

뭐, 대부분의 관객이라면 동의하겠지만, 성공한(흥행기준) 영화의 대부분의 소재는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역사를 소재로 하거나 둘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소재를 사용한 영화들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한반도] 등의 역사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그 흥행을 절반이상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이 어쨌든 간에 역사소재의 영화는 많은 관객의 호응을 얻어낸다. 더욱이, 먼 역사보다 가까운 역사일수록 그 효과는 커지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먼 역사를 다루면서 현재 한반도의 국제적 정세를 살며시 끼워 넣고 애국심까지 고취시키는 영화들도 등장하고 있다. [신기전], [황산벌] 등이 그런 맥락의 영화이다. 두번째인 소소한 일상의 소재는 [괴물]로 대표된다. 물론, 영화의 해석에 차이에 따라 [괴물]이 반미영화일수도 있고, 광주항쟁을 그린 영화라 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관객에게 어필했던 것은 바로 우리 이웃과 같은 서민들이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설정이었다. 또한, 한국 최초의 괴수영화, 더욱이 헐리웃의 장르적 특성을 모두 뒤틀어 버리면서 우리들만의 독특한 감성을 담아낸 것 역시 영화 성공의 주요한 이유였다. (물론 당시 1천만 관객 돌파는 거대 자본의 제작, 배급, 상영의 삼박자가 잘 맞아 떨어진 것도 있지만, 이것이 이후 이야기하자) 더 가까이에는 [추격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추격자]는 유영철과 강호순으로 연쇄살인 이라는 화두와 맞물려 흥행물살을 탔던 영화이다. 19세 미만의 폭력적 장면이 난무하는 스릴러였던 [추격자]는 소소한 일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누구도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공포에 공감하는 분위기로 관객들에게 어필됐다. [우생순]은 아줌마 국가대표들의 삶의 고닮픔을 그리면서 애국심까지 고취했던 탁월한 영화였다.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해운대로 돌아가자

[해운대]는 위에서 이야기 한 조건 중 두번째 조건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네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가 영화의 70% 이상 차지하고 인물들간의 갈등의 해소를 위한 장치로 쓰나미를 사용한다. 다가올 것이 예상되는 비극을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 비극의 존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영화 인물들의 사랑과 다툼, 갈등과 화해에 집중한다. 어쩌면 몇몇의 등장인물들이 쓰나미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쓰나미로 인한 공포나 인물의 죽음이 가슴아파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1시간 30여분의 인생과 사연에 안타까움으로 흘리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혹자는 우연이 너무 많다, 많은 등장인물들을 연결시키기 위한 작위적 설정이 많다라고 불평을 터뜨리지만, 잘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삶은 영화보다 더 복잡하고 징그럽게 얽혀있지 않은가. 그 복잡다단한 삶을 두시간에 이만큼 집약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한국형 재난영화의 시작

별다를 것은 없다. 굳이 "한국형" 이라 말하는 것도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헐리웃 거대자본의 대작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정서가 담겨있기에 "한국형" 이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해운대]에서 보여준 것은 "우리도 이만큼 할 수 있다"라는 소극적 자부심이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다"라는 적극적 자존심이 더 어울린다.. 그렇기에, [해운대]를 바라보는 관객은 같이 웃고, 울면서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해운대
감독 윤제균 (2009 / 한국)
출연 설경구, 하지원, 박중훈, 엄정화
상세보기





Posted by 지풍산
:


일단, 1편을 돌아보실까?

2007년, 아니, 보다 1~2년 전. 트랜스포머의 제작계획이 나오고 티저광고가 나왔을 때, 많은 영화광들이 말그대로 열광했었더랬다. 변신하는 로봇이 나오는 영화를 찍겠다니. 말이 될 법한 일은 아니였다. 블록버스터를 떡주무르듯 찍어내던 마이클 베이가, 말이 필요 없는 스티븐스필버그가 연출과 제작을 한다 했을 때, 그제야 조금 기대가 되기 시작했더랬다. 그리고 개봉한 트랜스포머. 글쎄. 신기하긴 했지만, 너무 빠르게 변하는 로봇들에 눈이 어지러워 지고, 소름끼치게 멋졌던 변신장면이 반복될수록 식어버린 피자처럼 퍽퍽한 이물감이 남았더랬다. 그래도!!!!! 변신하는 로봇들이 치고 박으며 싸우는 장면에서 느꼈던 쾌감은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스타스크림이 도망가면서 당연히 속편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고, 그에 앞서 이미 마이클베이감독은 3편까지 시리즈를 제작할 것을 천명했었다. 그리고 그 두번째가 찾아왔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디셉티콘 로봇. 로봇이 너무 많아 이름이 무엇인지 감이 안잡힌다.

이건 뭐지?

일단 리뷰이기에 내용은 빼자. 그러나 150분의 런닝타임동안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이건 뭐지?"였다. 뭐, 말해야 입만 아프지만 기술적 수준은 흠잡을 곳이 없다. 1편보다 늘어난 CG와 많아진 로봇의 대결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 기립박수감이다. 여전히 마이클베이 감독은 많은 컷을 짧은 시간에 교차시키고 카메라를 흔들며 그 빠른 화면 속도에 질세라 많은 로봇들이 변신과 결투를 반복한다. 말 그대로 관객의 정신줄을 잡을 틈을 제공하지 않는다. 1편의 신선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커진 스케일이 그 단점을 뒤엎을 정도다. 그런데 이건 뭐지?

헐리웃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샤이어 라보프. 그의 소년같은 이미지는 영화에 잘 어울린다.

소탐대실이라 하였던가

한간에는 많은 로봇인형을 팔기위해 60여대의 로봇을 등장시켰다고도 하지만, 역시 과유는 불급이라, 과도한 로봇은 영화에 악재였다. 150분에 구겨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넣어 보자고 작정한 듯, 영화는 시각적 즐거움마저 따라잡기 버거울만큼 산만하다. 또한 내러티브의 작위적 설정의 반복은 당연히 자연스런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러다 헛웃음까지 유발한다. 그 작위적 설정은 마치 프리즌브레이크가 시즌을 거듭하면서 초심을 잃고 수습이 안되던 것과 비슷하다.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 했던가. 그러나 영화에서 우연의 반복은 짜증일 뿐이다.

그래도 범블비는 너무 좋다. [트랜스포머 비긴즈:범블비의 탄생] 이런 영화 나오면 좋겠다.

욕심이 부른 참사

블록버스터를 본 뒤 느끼는 허무함은 이제 익숙해 졌다. 시각적 즐거움이나 스펙터클에 기대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동일방식설정을 지닌 블록버스터는 관람 횟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느끼는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매트릭스] 시리즈, [캐리비언의 해적], [스파이더맨] 등의 거대자본투입과잉스펙터클롤러코스터 블록버스터들도 속편을 거듭할 수록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속편의 저주는 숙명적인 것은 아니다. [배트맨]에서 보듯, 블록버스터 역시 진보가 가능하다. 그리고 관객은 그러한 영화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것은 나처럼 블록버스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대일 수도 있지만...

꼬리

겁쟁이가 된 메가트론과 스타스크림은 과연 3편에서 어떻게 나올까. 1편 메가트론의 카리스마가 그리워진다.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감독 마이클 베이 (2009 / 미국)
출연 샤이아 라보프, 메간 폭스, 이자벨 루카스, 레인 윌슨
상세보기



Posted by 지풍산
:

태어나서 별로 싸운 적이 없는 나는, 굉장히 쑥스럽게도 겁이 많다. 겁이 많아서 시비가 걸려도 스스로 몸을 사리는 편이다. 물론, 철없던 중고딩시절에 저글같이 같이 몰려다니며 몇 번의 폭력과 싸움을 도도하게 관망했던 적이야 많다.(참여하지는 않는다. 난 겁이 많으니) 이 경험은 아직 철없었던 20대 초반, 나의 활약상이자 마초적인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수많이 변용되곤 하였다. 그러나 내가 중고딩시절 경험했던 폭력은 역시 딱 중고딩 그 정도의 수준에서 끝나는 촌극이었을 뿐,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청소년의 강력범죄의 정도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누구를 싫어서, 혹은 입을 막기 위해서, 돈을 뺏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해 본적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글을 쓰지도 못하고, 어느 으슥한 골목길을 누비거나, 큰 학교에 들어가 매일 30분씩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을 게다. 
 
나는야 진정한 평화주의자 비폭력을 지향하는 사람. 10년전 이렇듯 선하게 생겼으니...


진정한 평화 비폭력을 지향하는 지풍산, 폭력을 말하다

사진을 보고 느낀 분노와 짜증은 일단 진정해 주시길 바라며, 본격적으로 영화이야기를 해보자. 오늘 주되게 바라볼 영화는 [파이트 클럽(1999년 데이비드 핀처 작품)]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년 코엔형제 작품)], [똥파리(2009년 양익준 작품] 이다. 이 세편의 영화의 공통점은 딱 하나. 바로 폭력이다. 각 영화는 폭력을 중요한 영화적 기제로 사용한다. 한편씩 살펴보자. 참, 일단 이 글을 읽기전에 위에 언급한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살며시 창을 닫기를 권장한다. 스포일러가 많은 글이다.

현실의 압박을 벗어나는 수단의 폭력


[파이트 클럽]은 1999년 세기말적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영화다. 삶의 즐거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잭은 어느날 비행기에서 타일러 더든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아주 우연하게 그날 밤 자신의 아파트가 화재로 사라지고 더욱 우연하게 타일러 더든과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없는 모든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타일러의 매력에 빠져든다. 아무 이유없이 자신을 힘껏 때려보라는 타일러. 잭은 폭력의 매력에 빠져들고 그들의 이유없는 싸움은 곧 미국 전역에 "파이트클럽"이 조직된다. 매주 하루씩 지하실에 모여 서로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그들은 광기어린 타일러 더든의 테러계획을 동조하며 군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속하는 모든 시스템의 원흉인 금융회사의 건물을 폭파한다.

            피흘리며 얻는 쾌감. 그것은 폭력을 미화하기 위한 변명이다.

삶의 탈출구, 그것은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

[파이트클럽]에서 폭력을 나누는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다람쥐 쳇바퀴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든 남성들이다. 그들은 온몸에 부숴저라 싸우고 승부에 상관없이 그 폭력의 카타르시스에 빠져든다. 구속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폭력으로 외친다. 그리고 그 광기어린 폭력은 개인간의 소통을 넘어서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로 치환된다. 그리고 미국사회를 구속하고 있는 금융시스템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모든 은행 및 금융회사를 폭발시키며 밀레니엄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이유없는 폭력과 테러는 타일러 더든의 깨알같은 언변에 의한 눈속임을 뿐, 진정한 저항과 투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잡는 손짓이며, 의미없는 폭력의 악순환일 뿐이다. 그것은 타일러 더든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과,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잭의 망상일 뿐이라는 결론이 영화 속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잭이 타일러요, 타일러가 잭이다. 타일러는 잭이 만든 망상에 불과하다.

구속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그러나 잭은 그러지 못했다.

잭은 자동차 사고 조사원이다. 미 전역 자사의 차가 사고가 난 곳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한다. 시차에 시달리고 불면증이 있으며, 사람과의 개인적 만남은 전무하다. 가구구입중독증이 있으며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한다. 구속하는 모든 것은 그에게 스트레스이며 불면증의 원인이다. 홀연히 나타난 타일러 더든은 잭의 분신이며 또다른 자아였다. 그러나 스스로 억제하고 있던 모든 감정이 뒤섞여 나타난 타일러라는 망령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수위의 폭력으로 진화한다. 결국, 자신이 타일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잭은,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몽롱했던 가수면상태에서 벗어난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마지막 그의 말은 구속하고 있던 모든 것에 저항하려 하지 않았던 그의 비겁함을 깨버린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비록 비겁한 폭력의 사도였던 타일러의 테러 계획이었지만, 타일러를 제거하고 맞이하는 밀레니엄의 테러는 결과론적으로 비겁한 폭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 또 다른 남자는 삶의 수단이 폭력이고 살인이다. 그의 살인에는 이유가 없으며, 그저 그래야 하기 때문에 살인을 한다. [노인을 위한 영화는 없다]는 돈가방에 얽힌 영화지만, 적절한 주인공도, 적절한 이유도, 적절한 합리성도 찾기 힘들다. 단지 살인으로 말하는 한 인물에 대한 건조한 관조일 뿐이다.

   바로 이 사람이 그 사이코패스 살인마다. 캐스팅 정말 잘했다.

돈에 얽힌 남자들. 그리고 드러나는 폭력성

한 남자(르롤린)가 사막을 지나다 돈가방을 획득한다. 그리고 도망간다. 탈옥한 연쇄살인범(안톤, 위 사진)은 조직의 청탁으로 그 돈가방을 찾기 위해 남자를 쫓는다. 그리고 그 두명을 쫓는 늙은 보안관(에드). 이 세명에 대한 이야기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줄거리다. 안톤은 르롤린을 찾기위해 쫓아가지만, 어느 순간 그 목적을 상실한다. 돈가방은 중요치 않다. 단지 도망가는 르롤린을 잡아 죽이는 것이 주된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를 잡아 죽이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는 알지도, 알 필요도 없다. 안톤은 르롤린을 잡지 못한다. 도망가던 르롤린은 안톤을 고용했던 조직의 상대 조직에게 살해당한다. 그 이후 안톤은 자신을 고용한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그 보스의 수하를 죽이고, 심지어는 르롤린의 아내에게까지 찾아가 그녀를 죽인다. 그리고 담담하게 그것이 숙명이라 이야기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르롤린의 아내는 무슨 죄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안관

르롤린과 안톤의 흔적을 찾는 보안관 에드는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노인이다. 그는 안톤도, 르롤린도 잡지 못한다. 그들의 흔적만 쫓는다. 그리고 안톤의 살인을 보며 그를 이해해 보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이유도 없지만, 설사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폭력과 살인이 만연한 그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에드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할 곳이 없다는 결론을 짓는다. 이것은 세대와 세대의 단절이며 시대 법과 질서의 혼란이며 폭력에 대처하는 공권력의 모습자체에 대한 회한이다. 그리고 폭력과 살인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 바로 돈이 세상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된 이시대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다.

마지막 안톤의 행동. 그것은 극적인 반전 혹은 당연함

에드는 돈을 가지고 도망가 결국 가족까지 위험에 빠뜨린 르롤린에 대해 비판적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안톤의 이유없는 살인에 대해 인간적 회의에 빠린다. 결국 아름다운 노년생활의 시작을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시작한다. 안톤은 이유없는 살인, 그리고 상실된 목적을 위해 르롤린의 아내에게 찾아간다. 그녀를 죽이고 나오던 안톤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팔뼈가 피부밖으로 튀어나오는 심한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오는 두 소년. 괜찮냐 묻는 그 소년들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봤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며 건낸 100달러 한장에 유유히 사라진다. 그리고 서로 나눠가지기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결국 영화는 물질만능주의의 미국 자체를 비판한다. 그리고 이유없는 살인마 안톤 역시 돈의 노예임을 밝힌다. 사이코 패스 살인만의 마지막 인간적 협상은 영화가 끝나도 관객을 찝찝하게 만드는 반전이다.

여기서 잠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 젖어있는 이시대 변질된 일부 386세대에 대한 일침을 가한 장면을 소개한다. 영화는 [괴물 2006년 봉준호 작품)]이다. 경찰에 쫓기던 박남일은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이를 발견한 노숙자가 그를 자신의 허름한 처소에 눕혀 간호한다. 아침에 일어난 박남일. 노숙자의 빈 소주병과 배낭을 챙기며 "내가 돈은 준다" 라며 지갑을 건내자 노숙자는 빈 병으로 박남일의 머리를 가격하고 "이 새끼가 돈이면 다 되는줄 알아.."라며 일침을 가한다.

  아프겠다.

폭력으로 파괴된 가족의 이야기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가족영화다. 그리고 양익준의 영화다. 감독이 연기하는 상훈은 어느 뒷골목에서 갖 튀어나온 건달이다. 어색함이 없어 그의 전직이 궁금하기까지 하다. 어쨌든, 이 영화. 폭력과 욕설로 치장하고 있는 [똥파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지만 감춰진 가정폭력에 대한 경고이다.

      상훈은 따뜻하다. 그래서 더 슬프다.

상훈과 연희는 둘 다 가정폭력의 희생자다. 상훈은 그 폭력을 이기지 못해 건달이 되었고, 연희는 그 폭력을 견디며 힘들게 살아간다. 누구보다도 가족의 정이 그리운 상훈은 그럴수록 더 폭력적이 되고, 더 거칠어 진다. 그의 폭력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이며 그 핏줄이 더럽게 아픈 것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미움이다. 영화는 상훈에게 세상과, 그리고 아버지와 화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은 변화의 시작은 가족을 다시 가질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의 빛과 따뜻한 한조각 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연희 동생 영재(오른쪽) 그는 영재이지만, 상훈의 어린 시절과 동일하다.

되물림 되는 폭력. 상처받은 가족.

[똥파리]가 단순히 가족의 중요함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정폭력의 되물림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가 더 크다. 상훈은 15년만에 출소한 아버지와 배다른 누나, 그리고 조카와 연희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을 찾는다. 그리고 건달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며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러나 연희의 동생인 한영재는 다시 시작되는 폭력의 악순환의 시작이다. 월남 찬전용사지만 아내가 죽고 정신줄을 약간 놓은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 영재는 상훈이 일하는 용역회사로 들어온다. 그리고 착한 심성을 감추고 폭력에 익숙해져 간다. 상훈의 뒤를 이을 것은 자명하다.



위 세편의 영화는 폭력을 각기 다른 수단으로 사용한다. [파이트 클럽]은 폭력으로 삶을 탈출하고자 하는 정신분열적 인간들을 보여주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돈을 둘러싼 폭력으로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이코패스를 통해 인간성이 상실된 건조한 미국을 그린다. [똥파리]는 끊이지 않는 가정폭력의 악순환과 그 폭력의 슬픔을 밀도있게 그려나간다. 그러나 이 모든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사회의 구조를 부숴버리기 위한 타일러 더든의 테러는 허상이며 망상이었고,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안톤은 결국 돈이라는 굴레 속에 목적을 상실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다.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상훈은 그 가족이 될 수 없으며, 그의 죽음과 동시에 영재라는 새로운 상훈이 비극적으로 탄생한다. 결국 모든 폭력은 그 이유가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하더라도 그 근원은 비겁하다. 다람쥐 쳇바퀴 속의 잭의 비겁함으로 나타난 타일러 더든, 가족을 위한다는 이유로 돈가방을 가지고 도망가다 죽어버린 르롤린과 그를 못죽이자 그의 아내라도 죽여야 한다는 안톤. 아버지의 폭력으로 여동생을 잃은 상훈의 뒤틀린 폭력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더욱 섬뜩한 것은 그러한 폭력은 단절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또 누군가에 의해 다시 살아나고 시작되는 것이다.

2009년 대한민국은, 그러한 폭력이 다시 살아났다.



2009년 우리는 영화 속 극단적 폭력보다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더 섬뜩한 것은 그 폭력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폭력의 끝은 비극이다.

2009년. 나는 그 분의 비극을 꿈꾼다.


파이트 클럽
감독 데이비드 핀처 (1999 / 독일, 미국)
출연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미트 로프
상세보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07 / 미국)
출연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조쉬 브롤린, 켈리 맥도널드
상세보기

똥파리
감독 양익준 (2008 / 한국)
출연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상세보기


Posted by 지풍산
: